토라포션 34 반역을 대하는 자세

이번 주 토라포션: 민16:1-18:32/ 사 66:1-24/ 눅 18:35-19:28

토라포션 34 반역을 대하는 자세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민 16:1-4)

 

광야 40년 기간 중 모세에게 가장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므리바에서 먹을 물이 없어 백성들이 모세에게 항의했을 때였을까?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처음 전투를 벌였을 때였을까? 아마도 최대 위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라당의 반역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나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때가 있다. 그것이 4살짜리 아들일 수 있다. 떼 쓰는 아이를 꺽기는 정말 힘들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 나와 반대편에 서 있을 수 있다. 직장 동료나 부하직원이 겉으로는 ‘yes’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며 반기를 들 때가 있다. 나를 반대하여 사람들이 일어서는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리더십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모세에게 대적하여 들고 일어선 중심 인물은 고라였다. 그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이었다. 모세, 아론과는 사촌지간이었다. 그에게 모세에 대한 불만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출애굽하고서 2년 후 인구조사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인구조사를 마치고 모세는 각 종족의 대표지휘관을 임명했다. 민 3:30, 웃시엘의 아들 엘리사반은 고핫 사람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의 지휘관이 될 것이며 여기서 웃시엘은 고핫의 네번 째 아들이다. 출 6: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모세는 고핫종족의 지휘관으로 엘리사반을 임명한다. 그는 고핫의 네번째 아들 웃시엘의 차남이었다. 고핫의 첫째 아들 아므람의 아들들 중에 아론은 대제사장직을 차지했고, 모세는 모든 지파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고라는 고핫의 두번째 아들 이스할의 장남이었다. 당연히 서열상 자신이 가문의 대표지휘관이 되어야 했는데, 고핫의 네번째 아들 웃시엘의 장남도 아닌 차남에게 지휘관의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고라로서는 당연히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구약의 유대 주석서인 미드라쉬에 의하면 고라는 애굽에서 요셉의 보물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애굽과의 연락장교로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에 이용될 때 작업할당원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애굽에서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광야에서 성막을 뜯어 증거궤를 어깨에 지고 나르는 레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이 힘들게 증거궤와 떡상과 등잔대와 제단을 차려놓으면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폼나게 성소의 임무를 담당했다. 그것을 볼 때마나 그는 대제사장 자리에 대한 야망이 커져갔을 것이다.

때는 38년 광야 생활의 마지막 1,2년경이었다. 백성들은 오랜 광야생활로 지쳤다. 지도자 모세는 늙었다. 이제 차기 리더십은 에브라임 지파의 젊은 여호수아에게 넘겨지는 분위기였다. 더 늦기 전에 고라는 반역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힘의 규합에 나선다. 그에게 동참한 자는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르우벤 자손이었다. 르우벤이 누구인가? 야곱의 장남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를 취함으로 장자권을 잃게 된다. 그 이후 모세의 리더십 아래에서 실질적인 장자권은 유다지파에게로 넘어간다. 장자 지파였지만 장자의 권세를 박탈 당한 르우벤지파도 모세에 대항한 불만세력이었던 것이다. 반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가져봤거나 여전히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고라는 르우벤지파만 포섭한 것이 아니다. 2절,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 정도면 유다지파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거의 온 백성이 고라편에 선 것으로 보여진다.

고라가 일어서서 한마디 한다. 3절,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는 민중의 지도자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말에 모세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보자. 배신감, 섭섭함, 억울함, 분노가 밀려왔을 것이다. 넘버3라는 영화에서 송강호가 쫄따구 부하 세 명을 놓고 헝그리 정신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 있다. ‘현정화,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을 세개씩이나 따버렸어’ 이 말을 듣고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토를 단다. ‘임춘애입니다. 형님.’ 그러자 그 후에 송강호가 그 부하를 두드려 패는 장면이 이어진다. 모세가 이 영화를 봤다면 공감했을까? 그러나 모세는 무너진 권위를 세우기 위해 복수하지 않았다.

자 이제 반역을 대하는 모세의 자세를 살펴볼 차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일어서서 모세를 대적할 때 모세는 같이 일어나 맞장 뜨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엎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다. 사람과 상대하기 보다 하나님께 먼저 나아간 것이다. 엎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 감정, 의지를 내려 놓는 행위다.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구하는 행위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겠다는 결단이다. 짧은 순간 엎드리며 모세는 고라가 하고 있는 주장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을 것이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총회 위에 자신을 세우신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반론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고라가 착각한 것이 있다. 세상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영적 리더십의 자리는 사람이 노력하여 얻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자리다. 그가 당을 지었다는 표현에서 히브리어 ‘라하크’라는 동사가 씌었다. ‘Take, 취한다’라는 단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자리는 사람이 취하여 얻는 자리가 아니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였다. 고라가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모세와 아론에게도 순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순복하기 전에 그들을 인간적인 눈으로 평가했다. 물론 모세와 아론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38년 동안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도 못했다. 그것이 무능해 보였을 것이다. 고라는 자신이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반역의 길로 가기 쉬운 것이다.

엎드린 후 모세가 했던 다음 반응은 ‘제안하는 것’이었다. 민 16:5-7,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을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6]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네 모든 무리는 향로를 가져다가 [7]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향로에 불을 담아 향을 피우는 것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세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제사장이 하는 일들 중 가장 상징적인 일인 향 피우는 일을 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 판가름을 내자고 제안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옳고 그름을 가리려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모세가 한 반응은 직면이었다. 민 16:7, 9-11,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11]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직면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직면하는 말까지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틀리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이 없다는 증거다. 모세는 그들의 반역의 핵심이 자기 지위에 감사하지 못하고 제사장 자리를 넘보는 탐욕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이 여호와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어서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며 이런 말을 전한다. 민 16:13-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4]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이 말은 ‘속이지 말라. 우리가 더 잘 본다’라는 말이다. 그들은 광야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에게 따지고 들만한 정당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은 밝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결과는 현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노예로 살았던 애굽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하는’ 지도자로 묘사한다. 모세와 아론이 광야의 힘든 상황을 몰랐을까? 그들이야말로 따질 만한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들은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모세와 아론, 그리고 고라와 250명의 지도자가 모두 향로를 들고 회막문 앞에 선다. 이 순간까지도 모세는 스스로 반역한 자들을 심판하려는 태도가 없었다. 민 16: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그는 자기의 권위를 임의로 휘두르지 않았다. 자신을 거역하여 일어난 무리들을 스스로 심판하여 처단할 뜻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조치에만 순복한 것이다.

사실 배역은 사탄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그래서 반역의 배후에는 사탄의 영이 작용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멈추게 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멈추실 수 없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 배역의 영을 심판하셔야 했다. 결국 땅이 열리고 고라편에 선 자들은 그 땅에 삼켜졌다. 분향했던 250명도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불살라졌다.

다음 날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는 원망이다. 하나님은 이 회중들도 멸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회중들을 위한 중보자로 선다. 염병의 심판이 시작되어 이미 만 사천칠백명이 죽었다. 그러나 모세가 아론을 통해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게 하며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게 했기에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고라는 결국 광야 끝자락에서 죽었다. 그의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함께 죽지 않았다. 민 26:10-11,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11]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 아들들의 이름은 출애굽기에 나온다. 출 6:24, “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이들은 아버지의 반역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계보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자.

대상 6:33-37,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34]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요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요 … [37]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요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요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요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고라의 자손에서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나온다. 그리고 다윗왕 때 찬양사역을 담당했던 헤만이 나온다. 시편에 이 고라자손이 쓴 시들이 있다. 시편 42편~49편, 87-88편이다. 시 42:1절을 보자.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고라자손들은 조상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만지게 된다. 그 권위를 만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도 순복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서열과 직분상 위에 있는 사람만 권위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로 이 땅에 세워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순복을 강요하기 전에 나보다 어리고 서열상 아래인 사람들도 진심으로 환대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권위를 존중할 때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 서로의 권위를 존중하라. 배우자나 자녀들의 단점을 빨리 발견하고 지적하기 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지지해주라. 보통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센스와 영적 감각이 뛰어나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이 대표권위자이긴 하지만 흔히 아내들이 사시를 하고 바라볼 때가 있다. 남편의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가나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직장에서도 대표권위자들이 있다. 내 위에 있는 상사들이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과 지시사항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을 것이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자식새끼들 때문에 꾹 참고 일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에서도 대표권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해 순복해야 한다. 다윗도 사울에게 순복하는 훈련의 기간이 있었다. 사울이 죽고 그는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7년 6개월을 더 기다린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위를 승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복의 훈련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때에 진정한 권위자로 세워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을 통해 진행된다. 이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은 힘을 규합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려 한다. 그리하여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의 자기왕국을 세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역의 영이고 사탄의 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를 결국 세워주신다. 바라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더욱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7월 9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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