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6 정결의 기준 

이번 주 토라포션: 민 19:1-22:1/ 삿 11:1-33/ 마 21:1-17

토라포션 36 정결의 기준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민 19:11-13)

 

죽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슬픔과 절망과 혼돈을 가져다 준다.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과 고통일 것이다. 광야 1세대들은 믿음이 없었던 죄의 결과 사망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광야 40년 동안 60만명이 죽었다. 여자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하루에 80명이 죽어간 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음과 부패로 인한 오염을 씻어내는 정결이 필요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한 절망도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율례를 말씀하신다. 붉은 암송아지로 재를 만들어 물에 섞은 뒤 그 잿물로 몸을 씻으라는 것이다. 붉은 암송아지는 히브리어로 파라 아두마다. 탈무드에 의하면 지혜가 많았던 솔로몬 왕도 이 파라 아두마의 율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유일한 계명이라고 한다. 솔로몬도 어려웠던 이 붉은 암송아지 재의 율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민 19: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9]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

보통 속죄제는 소나 양을 잡는 피의 제사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런 제사만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결코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부정하게 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멈춰서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면 가나안을 향한 여정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태워 그 재를 진영 밖 정한 곳에 두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부정해 졌을 때 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에 타서 우슬초로 그 물을 찍어 뿌리고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 율례는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는 율례였다. 민 19:20-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21] 이는 그들의 영구한 율례니라 자신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엄중한 율례였고 영구한 율례였다.

이 재를 만들기 위해 아무 송아지나 태워서는 안 되었다. Red heifer, 반드시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서 재를 만들어야 했다. 자, 그런데 붉은 암송아지를 본 적이 있는가? 얼룩소도 보았고, 누런 소도 보았지만 붉은 암송아지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소가 탄생하는 것은 기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지금까지 역사상 아홉 마리의 붉은 암송아지가 유대민족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붉은 암송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열번 째 붉은 암송아지가 제3성전이 재건되는 때 나타나 메시아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제 3성전을 건립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성전에서 쓰일 기물과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도 훈련하고 있다고 한다. 성전은 건축이 시작되면 3개월 안에 완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붉은 암송아지의 출현이다. 이 암송아지의 재가 없다면 제사장들과 성전 기물들을 정결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 일부는 이스라엘 독립 이후에 이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기만 눈에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1997년 하이파 농장에서 한 마리를 찾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멜로디라는 이름의 암송아지였다. 그런데 이 멜로디를 잘 살펴본 결과 꼬리에 흰 털 두개, 코털이 흰색이라 기준에 미달이었다고 한다. 그 후 탈리아라는 자매 붉은 송아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자격미달로 판명되었다. 자, 그런데 작년 7월 12일 이스라엘 성전연구소에서 발표가 있었다. 붉은 암송아지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발견된 붉은 암송아지의 수정란을 냉동시켜 이스라엘 소에 이식하여 현재 이스라엘에서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흠이 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최종적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제3성전을 재건하는 모든 준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전 건축의 타당성을 호소할 수 있는 신적계시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는 이런 기사를 썼다. ‘이 붉은 암송아지는 테러리스트의 폭발물이 갖는 특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해악을 몰고올 가능성이 있다.’

자 그런데 정말 이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일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붉은 암송아지의 출현을 기다려야 할까? 붉은 암송아지의 자격조건이 몇가지 있다. 첫째 흠이 없어야 한다. 둘째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한다. 세째 붉은색이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정한 기준은 다른 색 털이 두 개 이상 발견되면 자격 미달이라고 한다. 네째 진영밖으로 끌어내어 잡아야한다. 다섯째 다 태워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베드로사도는 말한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분은 흠없는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나셨다. 죄의 멍에는 메지 않으신 분이었다.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대신 뒤집어 쓰신 분이었다. 그 분은 영문 밖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 주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더 분명해졌다. 암송아지의 재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죽은 행실로 더럽혀진 양심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결한 자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결은 히브리어로 ‘타호르’이다. 정결은 하나님 앞에 내가 설 수 있는 자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정결하여 그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없다. 하나님의 기준과 그 분의 영광에 이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아무도 스스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죄와 사망에 접촉하여 모두가 부정해졌기 때문이다.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함이 처리되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우리의 정결을 위해 다른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다. 또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물이 뿌려져야 했다. 다윗왕도 그가 밧세바와 범죄하였을 때 이런 시편의 고백을 했다. 시 51:5, 7,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친밀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다. 그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는 침상을 적시며 회개의 탄식을 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서 있는가? 남 한테 해끼치지 않고 이 정도 착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성경은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없다고 선언한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다. 하나님의 과녁을 맞추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죄인이란 소리 들을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남들보다 선하게 살아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과녁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죄로 인하여 부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성경공를 하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과 자비만 베푸시지 왜 진노하실까?’라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거룩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해서 진노의 심판을 하셔야만 하는 분이다. 그래야 공의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의 대표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진노하신 이유다. 예수님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와 깊은 단절감과 그분의 진노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신 이유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정해진 자들이다. 부정을 씻고 다시 정결해지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정결해져야 한다. 무엇으로 정결해지는가? 정결은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암송아지의 잿물을 믿음으로 뿌렸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는 자격을 얻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한다.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 분의 보혈을 마음에 뿌림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죄로 인해 부정해징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악함으로 우리의 인생에 상처를 입게 된다. 사탄의 정죄와 참소로 스스로 무너지는 순간을 맞는다. 그러나 세상의 악함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도요한은 말한다. 계 12:10-11,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한다.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의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는 한번 흘려졌지만 그 피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날마다 뿌려져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죄와 사망으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만 있다면 세상의 악함과 다른 사람의 악함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순종하신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질 때 사탄은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선포하라. 적용하라. 그리하여 그 피의 능력으로 날마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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