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0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

이번 주 토라포션: 신 1:1-3:22/ 사 1:1-27/ 마 14:1-16

토라포션 40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29-33)

 

정통 유대인에게 가장 슬픈 날이 언제일까?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티샤 베아브’이다. 아브월 9일. 이 날은 BC 586년 첫번째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날이다. AD 70년 두번째 성전이 무너지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날이다. AD 135년 바르 코크바의 로마항쟁이 실패하며 10만명이 학살당한 날이다. 당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다’라는 나라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꿔버렸다.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었고 방문도 금지 되었다. 1년 중 오직 하루 아브월 9일에만 예루살렘 서쪽 벽까지 방문이 허락되었다. 이 날 방문하는 유대인들은 이 벽을 붙잡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통곡의 벽’이 된 것이다. 아브월 9일은 또한 AD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날이다. 그리고 AD 1492년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된 날이다.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 학살을 위해 뉘른베르크법을 선포한 날도 1935년 아브월 9일이다. 유대인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들이 거의 모두 이 날에 일어났다.

많은 종교인들이 이날을 기념하며 금식한다. 목욕도 하지 않는다.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다. 돌바닥에서 돌베게를 베고 자거나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아 기도한다. 이 날 높은 의자에 앉아선 안 된다.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히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날 회당에서는 예레미야 애가를 낭독한다. 애 1:1-3,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회당에서는 평소보다 촛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모임이 끝나고서는 불을 완전히 꺼버린다. 유대 민족이 직면했던 캄캄했던 암흑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브월 9일이 시작되기 직전의 샤밧은 ‘샤밧 하존’이라고 불린다. ‘계시의 샤밧’이란 말이다. 오늘이 바로 샤밧 하존이다. 이 날 토라와 함께 읽는 선지서 말씀이 이사야서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서 계시란 말이 히브리어로 ‘하존’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54년 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유다 백성에게 전했다.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계시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만해도 남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길 거절했다. 그래서 54년 뒤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이다.

지금 정통유대인들은 샤밧 하존을 통곡과 회개의 시간으로 보낸다. 그들은 예레미야 애가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 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그들은 메시야가 다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면 이 티샤 베아브는 한 해 중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샤밧 하존은 다시 희망을 품는 시간이기도 한다.

이 샤밧 하존에 읽게 되는 토라포션은 항상 신명기 첫부분이다. 신명기는 모세를 통해 다시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나오는 내용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를 통해 실패했던 유대 민족의 아픈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 삶속에서 그들의 아픈 역사의 패턴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교훈을 발견하고자 한다.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출애굽하고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왔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광야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거기까지 인도해 오셨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산지에 이른 그들에게 ‘올라 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격했으면 광야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길 원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자고 모세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거기서 거인 아낙자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인을 보고 쫄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들이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 중의 하나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위험한 순간을 피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우린 당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에 조차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단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우리를 속인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그랬다. 뱀이 하와에게 접근했을 때 하와가 말했다.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에 뱀이 응수한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은 하와에게 있었던 건강한 두려움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심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두려움을 하와에게 심는다. 그 두려움의 결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게 된다. 현실을 바라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게 된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 앞에 닥친 거인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묵상할수록 거인들은 실제보다 더 크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들은 아낙자손의 큰 손에 자신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으로 발전했다. 모세는 그런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신 1:26-27,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그들은 두려운 대상에 눈을 고정하여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두려움은 그동안 키워왔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을 오해하게 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신 가장 영광스런 모험을 포기하고 과거 노예시절의 안전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들은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았기에 다시 노예 근성이 발동된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두려움 속으로 되돌아 갔다. 두려움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동안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게 하셨던 하나님을 계속 믿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세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신 1:29-33,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미래가 불확실 할 때 우리는 두려워한다. 위험이 예상될 때 우리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그분과 함께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와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친히 애굽 군대와 싸우신 분이다. 광야에서 지친 백성들을 친히 안고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게 하신 분이다. 점점 커가는 애를 안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래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이 힘드면 언제라도 안아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철모르는 백성을 38년 더 안고 가셨다. 하나님은 또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하나님을 믿었다. 신뢰했다. ‘광야에서 우리를 이끌었던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까지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그 땅 거인들은 우리의 밥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을 넘어섰다.

우리 인생에서 거인만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인생이 캄캄해질 때가 있다. 나의 삶에도 그러한 순간이 있었다. 미국에서 4년간 공부를 마치고, 뒤늦게 신학을 하기로 결정하고 미국 신학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았다. 비자를 갱신하려고 31살에 한국에 나왔다. 그런데 비자갱신이 거절된 것이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한 수 한 수 두어왔던 바둑판을 하나님이 엎으신 것이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밤마다 집앞에 있는 학교운동장을 돌았다.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주운 신문 광고를 보고 신학대학원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아내를 만났다. 내 인생 계획이 어긋난 것에 대한 모든 미련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후로 나는 하나님이 방향 전환을 하실 때 적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우리의 인생이 흘러갈 때 우리에겐 두려움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두려움은 내가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현실이 전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 너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다. 자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을 예비하신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이 믿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광야에서도,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하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다. 두려운 현실에 스스로 매몰되어 원망과 절망으로 통곡했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선언하신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선언이 티샤 베아브,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믿는다. 티샤 베아브는 그들이 하나님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결과 맞이한 슬픈 역사의 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느낀 고통과 두려움을 너무 크게 느낀 나머지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다. 그들이 아직 어리고 힘들 때 그들을 안고 가신 하나님의 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막 칠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을 붙잡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다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두려운 곳으로 이끄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두려운 상황 속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 것이다.

즈금 한국 사회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청년들은 구직 자체가 두려움이 되었다. 30, 40대는 실직과 이직이, 50대는 퇴직이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움이 우리를 끌고 가게 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고백한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에겐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게 해야 한다. 두려움 자체가 없는 것이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겁을 상실한 사람일 뿐이다. 정말 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흔들림없이 믿는 사람이다.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불신 때문에 역사의 아픔을 경험한 날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에 무너져버린 인생의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이 날을 통해 우리가 상실한 것을 애도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며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품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주재원들이기에, 학생들이기에 이동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불확실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두려움도 커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다.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하시고 지시하시는 분이다.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거나, 멈춰서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삶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펼쳐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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