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6 새 언약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2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예레미야  언약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 31:20-22)

 

결혼은 영원한 언약관계를 맺는 것이다. 언약은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것이 되고 그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איש),여자는 이샤(אשה)다. 그런데 이쉬에서 요드(י) 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יהוה)에서 온 것이다. 이샤에서 헤이(ה) 역시 하나님의 이름 야훼(יהוה)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 각각의 존재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 에쉬(אש)만 남는다. 히브리어로 에쉬는 ‘불’이다. 불과 불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불바다가 된다. 서로를 태워 함께 소멸되고 만다. 이처럼 하나님이 빠진 인생에는 격렬한 분노만 남는 것이다.

 

트럼프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의  예루살렘에는 언제쯤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눈에 숨겨졌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탄식이었다. 그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해마다 성탄절이 반복되어도 그들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의 주인이 바뀌면서 예루살렘만큼 짓밟히고 피로 얼룩진 곳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레미야 30장에서 33장은 특별히 ‘위로의 책’이라고 불린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과 위로의 메세지를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3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마는 베들레헴에서 약 14km 북쪽에 위치한 도시다.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왜 이곳에서 라헬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을까? 라헬은 야곱의 12번 째 아들 벤야민을 낳다가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었다.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다. 그러나 임신을 하지 못해 오랫동안 자식을 갖지 못한 한이 있었다. 야곱이 열한번째 아들 요셉 출산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까 라헬은 야곱과 결혼하고서도 약 20년 동안 자기가 낳은 자녀 없이 산 것이다.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시고 태의 문을 여신다. 요셉이 나왔다. 그 이름은 ‘그가 더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라헬은 요셉을 낳고서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하나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향 땅에 와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것이다. 평생을 자식 때문에 곡하다가  간 인생이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식 때문에 애곡했던 라헬의 심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라마는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포로들이 마지막으로 집결했던 곳이다. 먼 이방땅으로 끌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어미들이 통곡했을까? 당시 애곡하던 어미의 심정을 라헬을 통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극한의 고통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한다.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통곡으로 살아가는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31: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울음 소리와 눈물을 멈추어라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지파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브라임으로 불렀다. 그들이 죄가운데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창자가 들끓는 듯한 아픔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작정하셨다.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성읍들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며 포로에서 돌아올 때 필요한 이정표를 세우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신다.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여기서 하나님이 하실 새 일은 무엇이고,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맺으리라 하나님께서 하실 새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언약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31:32, “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결혼한 남편과 아내관계로 묘사하실 때가 많다. 호세아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바알 때문에 바람난 아내로 묘사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2:13)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11: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하나님은 마음에 정함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리실만도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시작하신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11:8-9,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마음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사라진 도시인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2:16-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부정과 불륜으로 더럽혀진 옛 언약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언약을 맺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것은 아내가 틈만 나면 바람피우는 관계가 아니라 아내가 먼저 남편을 찾는 관계이다.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는 말은 여자 안에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갈망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편된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새로운 언약관계가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겨지길 원했다. 31:33, 그러나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질 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새언약을 시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하여 성탄은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 시행된 날이다. 그리고 이 땅에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새로운 언약을 위해 고스란히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잔은 피로 세우는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6:28, 이것은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을 통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진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표현한다. 8:7-8,10, “[7]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리라… [10] 주께서 이르시되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 언약의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일이다. 통곡의 삶에서, 죄의 포로된 삶에서 돌아와 참된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새 언약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언약 백성이 된다. 여자든 남자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생이 될 때 우리는 불로 소멸되지 않는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예루살렘의 역사는 결코 통곡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새예루살렘으로 회복된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21:1-4, 내가 하늘과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내가 보매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셔서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예루살렘의 진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비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그것이 언약의 공식이다. 바라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갈망하는 새언약 백성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장차 새예루살렘에서도 주님의 생일을 함께 기뻐하는 자로 만날 수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