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 하나님이 먼저다

2018년 6월 1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7 하나님이 먼저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 7:32-35)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밤하늘의 별을 함께 바라본다. “저 별을 따다 너에게 줄께” 가당치도 않은 말이 진심으로 들려온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해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부푼 기대를 안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다음 날부터 우리는 나의 배우자가 별을 따다 줄 수 없는 사람임을 절감한다. 결혼과 함께 이루어질 것 같았던 많은 꿈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기대가 사라지는 것을 날마다 확인한다. 슬픈 이야기다.

 

작년 2017년 한국에서는 26만 4천 5백 커플이 결혼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만 6천 커플이 이혼했다. 하루에 290쌍이 갈라 선 것이다. 이혼 사유를 보면 5위가 부부관계 거부, 4위가 집안 무시, 3위가 배우자 외도, 2위가 경제문제, 1위가 성격차이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이혼에 대한 견해는 어땠을까? 당시 유대교에 양대 산맥이 있었다. 샴마이학파와 힐렐학파다. 샴마이학파는 간음 외에 이혼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힐렐학파는 여자가 빵을 태워도 이혼할 수 있다고 했다. 이혼 증서를 쓰는 법적 절차만 밟으면 어떤 일이든 꼬투리를 삼아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

 

바울 당시 헬라인들은 어땠을까? 헬라인들은 여자도 이혼을 제기할 수 있었다. 당국에 보고하는 것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7장에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제기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질문에 대해 바울이 답변했던 내용이 나온다. 몇가지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할 진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고전 7:1-3, “너희가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여기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라는 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일부 성도들의 생각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제기한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성경이 이를 잘 번역했다: Now concerning the matters about which you wrote: “It is good for a man not to have sexual relations with a woman.”

 

당시 헬라세계에는 성에 대하여 두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었다. 하나는 쾌락주의다. 영혼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몸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금욕주의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적인 관계를 끊고 순결한 영의 상태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내의 금욕주의자들은 결혼한 부부가 이혼을 하든지, 아니면 같이 살면서도 성관계를 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자는 서로가 상대방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의무를 다하라고 권한다. 물론 음행을 피하는 것이 결혼의 주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사회에 음행이 만연했었다. 그러한 상황을 비춰볼 때 결혼을 통해 성관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음행을 피하는 최선의 길이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어 싱글들과 과부들에게 제언한다. 고전 7:8-9,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은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한다. 영국의 성서학자인 브루스교수에 의하면 바울은 홀아비였다. 유대 랍비였던 그가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의 아내가 이혼하여 그를 떠났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과부들은 자기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특수한 형편 때문이다. 즉, 바울은 26절에서 ‘곧 임박한 환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한다. 이 임박한 환란은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으로서 겪게 될 핍박일 수 있다. 29절에서 바울은 ‘그 때가 단축하여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종말을 사는 긴장이 있었다.

 

롬 13:11-14, “또한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고 난 뒤 바울의 인생 시간표가 달라졌다. 그의 삶은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시작될 영원에 초점이 맞춰진 삶이었다. 그 영원에 비해볼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너무 짧고, 날마다 단축되는 삶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현재의 시간은 ‘자다가 깰 때’가 된 것이다. 육신의 일을 추구하며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분과 함께 시작될 영원을 기다리고 단장하며 사는 시간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을 주면서도 성도들이 가져야할 보다 근본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

 

고전 7:29-31, “형제들아 내가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쓰지 못하는 같이 하라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결혼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하기 위해 돈 버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외형에 불과하고 다 지나가고 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깨어 있으라’고 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 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세상에서 지나가고 마는 외형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에 매여 산다. 직장에서 영혼까지 털리도록 일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감수한다.

 

부부 문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한다.

 

고전 7:32-35,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염려 없기를 원했다. 여기서 염려란 원어로 마음이 나뉘어지는 것을 뜻한다. 염려는 마음이 하나로 정렬되지 못하고 나뉘어진 상태를 말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한 마음이 결혼 이후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갈라진다. 바울은 배우자와 가족을 돌보지 말고 교회 일만 하라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과 가족을 절대시하여 온통 그것에만 마음 뺏기지 말라는 권면이다. 흐트러짐없이 주를 섬기는 삶을 회복하라는 도전이다.

 

바울의 결론은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삶의 목적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아내만을 위한 삶, 남편만을 위한 삶, 자녀만을 위한 삶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삶이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사랑하며 영원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 때 어떠한 유익이 있을까? 영원한 것에 집중하며 살 때 지금 삶에서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아내나 남편을 더 사랑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때 우리는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누릴 수 있게 된다.

 

 

가정사역자인 윌터 트로비쉬는 결혼을 삼각형에 비유한다. 가운데 꼭지점에 하나님이 있고 남편과 아내는 각각 좌우 꼭지점에 있다. 배우자가 각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그들은 서로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가 되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다. 결혼을 했든, 결혼을 하지 않았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나뉘어지지 않고 흐트러짐없이 주를 섬기는 삶의 목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 각자가 얼마나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던 제자들은 그들의 오랜 관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서로 다투며 각자 높은 자리에 앉게 되길 원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바라던 별을 따줄 수 있는 분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자 그들은 절망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들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순절 그들은 성령을 체험한다. 그 후 그들의 인생의 관점이 바뀐다. 그들은 더이상 이 세상의 지나갈 외형을 쫓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들로 바뀐다. 주님을 위해 목숨 걸고 별이라도 따다 드릴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된다.

 

성령이 임해야 가정과 결혼과 배우자에 대한 온전한 관점이 회복된다. 성령이 임해야 세상의 외형에 묶인 인생 문제의 사슬을 끊고 영원을 위해 살게 된다. 성령이 임해야 주님 한 분을 섬기는 순전한 목적을 우리는 붙들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는 반드시 유익이 있다. 바울이 말한 유익은 원어로 ‘함께 열매를 맺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먼저 그 분을 섬길 때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은혜가 열매로 맺혀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그 기대를 포기했겠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내 인생에 별을 따다 주지 않은 것으로 인해 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나의 배우자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인 것으로 기뻐하길 바란다. 서로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한 목적보다 먼저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부르심을 통해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목적을 세워 나가길 바란다. 여러분의 삶이 결혼이든 싱글이든 각자의 자리에서 더 높은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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