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 복의 상속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6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3 복의 상속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 3:13-14)

복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복을 받기 원한다. 새해가 시작될 때도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한다. 우리가 받은 인사만큼 복을 받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복을 받기 원하실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복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길 바라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일까? 창12:2-3절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렇게 말한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축복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복이다.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약속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은 생각도, 행동도 다를 것이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해 살다보면 복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사람이 가는 곳에서 사람들은 그를 축복한다. 혹 그를 시기하며 그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뒷 일을 알아서 처리해주시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원수를 갚는데 마음을 빼앗길 이유도 없다. 그저 나 자신은 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데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복은 그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밝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아브라함의 복의 상속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근거가 뭘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본질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갈 3:1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람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바울은 구약 성경에 정통했던 랍비였다. 그런데 그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창 22:17-18절을 보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런데 여기서 ‘네 씨(זרעך)’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씌였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네 씨’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유대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허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민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자 그렇다면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한 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갈 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 살던 이방인이었다. 그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칭함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것은 무할례시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롬 4:11-13,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의 진정한 상속은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죄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정죄 받는다. 즉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갈 3:10-1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나?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받으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저주 받으신 이유를 갈 3:14절은 이렇게 말한다.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이 말씀이 오늘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저주가 되신 예수님의 행동을 믿는 자가 되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며,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누리는 궁극적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 복을 온전히 누리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롬 8:14절은 말한다.“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니다. 평생 순간순간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최고의 복인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훼손하려 한다. 그 전략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거절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지난 날의 상처 때문에  거절감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요즘 사회에서 시대가 주는 어려움 때문에 내가 복이라는 존재감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저주를 이미 끊으셨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는 특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이미 주어졌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임을 선포해야 한다.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우리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길 원한다.“내가 ______로 큰 민족을 이루고 _____에게 복을 주어 ______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_____는 복이 될지라 ______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_______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_______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복인 자들이 되었다. 사람이, 환경이, 사탄이 우리의 존재적인 부르심을 흔들 수 없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길 소망한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 자신이 복이 되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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