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7 예수의 흔적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9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7 예수의 흔적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4-17)

한국에 가기 전 한국에서 만날 한 청년과 카톡을 했다. 그런데 그 형제 카톡 대문 사진 밑에 ‘스티그마’라는 단어가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치욕, 낙인, 오명’이란 뜻이 있었다. ‘얘가 요즘 문제가 있었나? 삶이 좀 힘든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식의 소치였다. 며칠 뒤 나는 그 단어가 ‘예수의 흔적’이란 말에서 ‘흔적’이란 단어의 헬라어임을 알게 되었다. 바울이 그 몸에 지녔던 예수의 흔적을 그 청년도 그의 삶에 간직하길 원했던 것이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마지막 시간이다. 바울이 추구했던 삶,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도전했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편지를 보낼 때 보통 자기가 구술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받아쓰게 했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큰 글자로 직접 편지를 쓴다. 너무도 강조하고 싶았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졌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유대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란 다름 아니라 할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 때나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동족 유대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자라는 자신들의 신분을 포장하기 원했다. 안 그러면 놀림받거나 왕따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차선으로 선택한 것은 할례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따를 때 일어날 수 있는 박해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지혜를 추구했던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범죄자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말도 안되는 주장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일까?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선포한다. 십자가는 나의 선함이나 나의 의를 자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십자가는 현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특히 지식인들, 남들보다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 십자가는 숨겨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자랑하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할 때 그의 삶에는 놀라운 전환이 일어났다. 세상이 자신에 대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더이상 그의 삶에 통제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예수 믿기전 바울은 어쩌면 세상의 인정이 전부였던 자였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자랑할 것이 너무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의 고백처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세상은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를 통제하는 힘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세상 사람들의 인정에 마음쓰며 살고 있다면 나는 아직도 십자가 외에 다른 많은 것들을 자랑하기 위해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갈 6:15-1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의 인정과 외양에 연연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내면의 변화가 밖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내 속사람이 변화되었기에 겉사람도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반응과 상관없이 내면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끝으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이라는 뜻의 ‘스티그마’는 ‘낙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누가 주인인지 구별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불에 달군 인두로 낙인을 찍었다. 바울은 세상을 향해 자기 소속을 분명히 하기 원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예수의 종임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십자가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개독’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예수의 흔적을 가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조롱받고 핍박 받을지언정 그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예수를 따르는 자라는 오명을 기꺼이 선택했던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교회의 위기를 느꼈다. 점점 더 한국사회에서 예수 믿는 자로 사는게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가 더욱 반기독교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어서 많은 교회들이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번에 교회만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존립 자체에 대한 위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정말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을 지닌 성도와 교회들이 일어날 때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바라기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며 쩔쩔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며 세상을 무력화시키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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