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2 승자독식 사회에서 예언자의 비전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9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이사야서 2 승자독식사회에서 예언자의 비전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사 2:2-4)

ABBA라는 스웨덴 그룹의 ‘The Winner Takes It All’이란 노래가 있다.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standing small/ Beside the victory/ That’s her destiny…’ ‘승자가 모든 걸 차지합니다. 패자는 그 승리 옆에서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죠. 그것이 그녀의 운명입니다.’ 참 슬픈 노래다. 지난 주 ‘승자독식사회’란 책을 읽었다. 원제목은 ‘The Winner-Take-All Society’였다. 이 책은 1995년에 출간되었다. 당시 미국에 나타나고 있던 승자독식 현상을 다룬 책이다. 이긴 자가 전부를 가지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 무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승자독식사회다. 우리나라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승자독식사회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술 개발에서 이긴 기업만이 살아남고 거기에 뒤처지면 대기업이라도 하루 아침에 망할 수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밤낮없이 전쟁과 같은 경쟁의 현장에 내몰리는 것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어른이고 아이고 예외가 없다.

그러나 승자독식은 오늘날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선택한 이후부터 인간 사회의 운명이자 현실이 되었다. 선악의 열매를 맛 본 인간은 본성적으로 내 눈에 보이는대로, 탐욕이 이끄는대로 산다. 고대 사회에서 승자 독식은 전쟁으로 나타났다. 힘으로 남의 영토를 빼앗은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다시는 전쟁이 없는, 승자 독식이 끝난 사회의 모습이다. 4절,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서로 전쟁하지 않는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이사야 선지자는 왜 이런 비전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한 것일까? 오늘 함께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열방의 무리들이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이유가 뭘까? 그것이 소용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판결을 들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만방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을 예언한다. 그들이 오면서 하는 말을 선지자는 들려준다. 3절,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 진리를 더 알기 위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칼과 창을 쳐서 보습과 낫을 만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의 권위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 이사야가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비전을 던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러한 이상과 대비되는 유다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당시 유다는 주변 패권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앗수르 제국이 고대근동을 독식하는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당시 정치인들은 강대국들을 두려워 했고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제국의 기세 너머 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다. 그는 현실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주목했다. 그는 앗수르를 패권국가로 본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꿇고 더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나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때에 일어날 이 비전을 보지 못하고 승자독식의 숨막히는 현실에 집착했다. 율법이 시온에 있었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 있었건만 그들은 더이상 토라의 이상을 따라 살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았다.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권면한다. 5절,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그러나 그들의 삶의 현실은 여호와의 빛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의 백성 야곱을 버리신 이유를 열거한다. 첫번째는 ‘동방풍속’이다. 6절,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는 바벨론이 있었다. 바벨론은 점쟁이들와 술사들이 많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동방의 종교에 그들의 미래를 물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해질 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진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때 교회다니는 사람들도 점집을 찾는 것이다.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점쟁이들에게 묻는 것이다. 승자가 너무도 적은데 자신들도 그 대열에 낄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망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두번째 이유는 ‘은금’ 때문이다. 7절,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웃시야왕이 다스린 때는 유다가 번성한 시대였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은과 금에서 안정감을 누렸다. 그들이 사들인 말과 전차에서 그들은 국가의 안보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이 누린 물질적 풍요는 더이상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신앙의 타락을 가져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세번째 이유는 ‘우상’ 때문이다. 8-9절,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아하스가 다스렸던 때 기원전 730년 무렵 유다는 우상숭배가 극심했다. 대하 28:1-4,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아하스 시대에 바알신앙과 몰렉제사가 성행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은 유다를 아람왕과 북이스라엘왕의 손에 넘기신다. 그리하여 하루에 유다 용사 12만명이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는 것은 스펙이 없어서가 아니다.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그 시대의 우상을 따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아무리 승자가 독식하는 시대에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여호와의 빛가운데 행하라고 선지자는 도전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칼과 창으로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습과 쟁기를 쳐서 칼과 창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안도감을 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쓰려는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이 말씀처럼 칼로 일어선 자는 다른 칼에 의해 무너진 것이 제국과 개인의 역사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당한 노력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 쌓는 스펙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쟁취하기 위해, 남 위에 서기 위해 거짓으로 부풀린 스펙과 내두른 칼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찌르는 칼로 돌아오고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산(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가 왔고,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며 여호와의 빛가운데로 나아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호와의 빛이 없을 때 우리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의 빛가운데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의 주관자임을 보게 된다. 그분의 판결이 이 땅에 시행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의지한 우상들이 헛 것이며, 자신들을 무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칼과 창이 더이상 소용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미래임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교회는 예언자의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가치와 물질만능주의, 우상숭배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저 남들보다 높아지고 성공하는데 주력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데 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불의를 외면해선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적극적으로 세워가야 하는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패권이 세상을 호령할 때 모든 열방을 판결하실 하나님의 음성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권력과 돈의 힘이 좌우하는 승자독식의 사회 한 복판에서 주님의 평화의 통치가 이루어질 미래를 내다보았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이 예언자의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 이사야처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알 때 우리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현실이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 위에 서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축복을 나누며 사는 하나님나라 목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여전히 소수가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조그만 성취가 성공으로 느껴지지 않는 불만족스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판결과 완전한 통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변함없이 여호와의 빛가운데 행할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길 원한다. 바라기는 세상의 풍조를 거스려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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