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 예언자의 소명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2019년 10월 5일 이익환 목사

이사야서 4 예언자의 소명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8)

소명(召命)의 사전적 정의는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이다. ‘부를 소(召)’에 ‘목숨 명(命)’자가 합쳐진 단어다. ‘목숨을 불렀다’는 말이다. ‘부를 소(召)’자를 보면 ‘칼 도(刀)’에 ‘입 구(口)’ 자가 합쳐져 있다. 부르는 입에 칼이 있다. 그야말로 그 부름을 어기면 목에 칼이 들어 오는 준엄한 부름이다. ‘목숨 명(命)’은 ‘입 구(口)’와 ‘명령할 령(令)’이 합해진 글자다. 입으로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명령할 령(令)’자는 ‘모일 집(亼)’에 ‘무릎 굽힐 절(卩)’자가 합해진 것이다. 모여서 무릎 궆힌 사람에게 하는 것이 ‘명령’이다. ‘목숨 명(命)’자는 윗사람의 명령에 부름받은 자의 목숨이 달려 있기에 목숨이란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의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뜻을 아는 것, 내가 목숨 다해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그것은 내 인생에 안전감을 가져다 준다. 내가 인생 헛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소명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을 말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너무도 소중한 일이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삶은 과연 천명(天命)을 따르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다. 기원 전 739년경의 일이다. 웃시야는 남유다의 열번 째 왕(BC790-739)이었다. 그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남유다를 다스린다. 남유다를 가장 오래 다스린 왕이었다. 역대하 26장 5절은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웃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스가랴가 사는 동안 강한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구하는 웃시야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대로 강하게 하셨다. 대하 26:8,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그의 치세에 주변 나라들은 조공을 바쳐야 했고, 대제국 애굽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대하 26:14-15,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여기서‘기이한 도우심’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페이버’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야 일이 풀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음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런데 사람은 강해질 때,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웃시야는 그가 강해지자 교만해진다. 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선을 넘은 것이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왕이었지만 제단에 분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만 허락하신 고유 권한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침범한 것이다.대하 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웃시야는 그의 생애 말년 10년 가량을 나병환자가 되어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자 그런데 그의 말년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사야였다. 대하 26: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사야는 웃시야왕의 사촌이었다. 그는 왕실 서기관으로 당시 지배층과 상류층의 상황을 두루두루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왕이 죽었다. 나라는 기울어가기 시작하고 주변 열강들은 남유다를 넘보기 시작했다. 웃시야왕이 죽던 그 해는 신흥제국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이 서방 원정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신 것이다.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높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게 된다.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서로 창화하여 외치는 천사들의 찬양을 듣게 된다.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 ‘아도나이 쩨바옷(צבאות יהוה)’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군대와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의 모습이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온 세상의 주권자를 본 것이다. ‘아 이 나라의 운명이 왕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다른 제국이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는 하나님의 발등상 앞에 엎드리며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직 높은 보좌에 계신 주님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통치하시는구나, 나라의 운명, 역사의 진행을 하나님이 결정하시는구나’ 이사야의 소명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 또 그 영광과 주권을 선포하는 찬양소리를 들으며 시작된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뒤,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당시 정세가 불안하다보니 그 사회 안에 불신과 비판과 원망의 말이 가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안한 시대에는 의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의로운 심정으로 죄악된 시대를 비판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는 한 시대의 의인들이 그들 자신이 뱉었던 말에 의해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한다. 이사야는 함부로 말을 뱉었던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정한 자인가 절감하게 된다. 하나님이 하실 역사를 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성급히 내뱉었던 자신의 입술이 얼마나 함량미달인지 그는 절감했던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생각했던 것, 즉 인본주의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사야의 소명은 이처럼 이사야 안에 있던 자기의가 깨지고, 그 안에 자리잡고 있던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거두어지면서 본격화된다.

사 6: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제단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하게 하며 그의 죄를 사해주신다.‘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여기서 ‘악’은 히브리어로 ‘아본’이다. 모든 범법행위를 의미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빗나간 인간의 본질적인 죄를 뜻한다. 이사야는 그의 소명과 함께 하나님의 속죄를 경험한다. 신약시대에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속죄를 경험한다. 모든 범법과 하나님의 과녁에서 벗어난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씻어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 속죄를 경험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소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는 속죄를 경험한 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었다. 하나님은 시대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그의 목숨을 요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는 응답한 것이다. 결국 그는 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권력층의 미움을 받아 톱으로 잘려 순교하고 만다.

소명에 응답한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그의 사명을 말씀해 주신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마음은 확고했다. 유다백성을 반드시 심판하실 작정을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를 부르셨는데,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심판을 전하는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이사야의 선포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사야가 받은 사명이었다.

좀 당황스러운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이사야는 하나님께 질문한다.사 6:11-12,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약 154년 뒤에 성취된다. 기원전 586년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지난 주에 살펴봤던 땅부자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땅을 독차지했던 자들과 그 후손들은 결국 땅과 집을 다 잃고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다른 작정이 있었다. 그것은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었다.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다수에 의해 진행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수의 하나님의 뜻에 주목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는 진행되는 것이다.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고토로 돌아온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 땅에 다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진행해 가셨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인생의 진정한 존재목적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목숨을 다해, 내 삶을 걸 수 있는 소명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와지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분명할 때이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불행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소명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구원과 속죄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사함을 받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갈 청지기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사실 이 땅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가득하다.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있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워갈 사람들을 지금도 부르고 계신다.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권력과 탐욕의 왕국을 세워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가라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바라기는 이 부르심에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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