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5 만나를 주신 이유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2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5 만나를 주신 이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1-4)

소수의 가진 사람들이 안전하고 다수의 대중들이 불안을 느낀다면 그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일 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회 역시 디스토피아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 뒤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광야라는 척박한  현실이었다. 출애굽 이후 유토피아를 기대했건만 또 다른 형태의 디스토피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당장 유토피아를 선물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허락하신 걸까? 함께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첫째달 십오일에 출애굽을 한다. 둘재 달 십오일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딱 한 달이 되는 때였다. 출애굽의 환희를 노래했던 그들의 입에서 이제 원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만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에서 모두 다 굶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출 16:2-3,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애굽에서 자기 집 문기둥에 양의 피를 바를 때만 해도 그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홍해를 건널 때만해도 그들에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감격은 광야 생활 한달만에 바닥이 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실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과거 애굽 시절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한다. 그들은 과거를 미화하고 있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때를 잊은 것이다. 그 노예생활에서 꺼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당장 현실에서 부딪히는 배고픔에 주목한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난리치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구원의 걸음마를 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아셨다. 그래서 그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광야에서 식탁을 차려주겠다고 친절하게 약속하신다.

그래서 주신 양식이 ‘만나’다. 출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하나님이 이 만나를 주신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원어의 뜻은 ‘너희가 나의 토라 안에서 걸어가는지 아니하는지 시험해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배고픈 회중들, 쉽게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을 만들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장차 그들이 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열방에 전하는 민족으로 세우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을까? 첫째는, 광야에서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광야는 양식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그러면서 그들의 원망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바꾸어지길 원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르치기 원했다. 출 16:16-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나님께서는 매일 각 사람의 수효대로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매일 의지하고 기대하게 하셨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 완전한 양식의 배분, 부의 배분이 일어났다.

셋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가르치기 원했다. 출 16:22-23, 27,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안식일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두배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그리고 일곱째날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도 허탕치게 하셨다. 흔히 유대인 공동체가 건강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이유가 이들이 샤밧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세기에 아하드 하암이란 사람은 “유대인들이 샤밧을 지켰다기 보다도 샤밧이 유대인들을 지켰다”고 말했다. 샤밧은 원어적으로 ‘쉬다. 중지하다’라는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일을 멈추고 가정에 모여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즐기는 날인 것이다.따라서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해야 경쟁에서 살아 남는게 아니다. 잘 쉬면서 창조주가 누리라고 하신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먹고 사는 문제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중요함을 가르치기 원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더 많이 벌어서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는게 목표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점점 소비적 자아가 된다. 그런데 소비적 자아는 탐욕의 자아다. 끊임없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달려가는 자아다. 한병철 씨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이며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예나 지금이나 풍요를 추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바알신앙이자 맘몬신앙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돈에 떠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생명의 떡인 예수를 보여주기 원하셨다.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생명의 떡이다. 많이 받은 자나, 적게 받은 자나 모두가 모자라지 않게 예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나를 통해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나님은 만나가 우리의 양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의 양식임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에 만족하지 못했다. ‘만나’ 말고 ‘다른 거’를 원했다. 민 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온 백성들이 이제 하늘 양식에 길들여지길 원하셨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만나로 만족해야 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세상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들이 많아지고 있다.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신 하나님은 때론 우리의 삶에서도 광야의 길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지 보기 원하신다. 디스토피아같은 현실을 살면서 단지 그 현실을 원망하는 게 우리의 부르심이 아니다. 광야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만나로 자족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인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하며 열방을 섬길 수 있는 제사장 훈련을 받았다. 이스라엘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기에 우리에게 이곳에서의 삶이 광야와 같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바라기는 광야를 통과할 때 매일 만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둘 수 있길 바란다. 황량한 광야에서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방식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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