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7 일상의 예배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3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7 일상의 예배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출 29:42-43)

한국교회 예배가 멈춰졌다. 한국전쟁 중에도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다는데, 코로나로 인해 예배가 중단되었다. 많은 교회들이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예배로 전환했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교회들은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 위임식을 하며 제사 제도를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의 백성들에게 왜 예배가 필요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29:38-39,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며 7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7일 동안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마리를 아침과 저녁에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들을 세우는 이 위임식 규례는 이후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서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확장된다.

민 28:3-4,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흠 없는 숫양 두 마리를 상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상번제’는 ‘올라 타미드 (עלה תמיד)’다.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이고, ‘타미드’는 ‘항상’이란 뜻이다. 희생 제물 전체를 태워 항상 제물의 향이 올라가게 드리는 제사가 ‘상번제’다. 하나님은 왜 하루 중 두 번씩이나 이런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을까?

유대 미드라쉬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예수님이 활동하기 바로 전 유명한 성경학자 힐렐(Hillel)이 여러 랍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대교의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벤 조마(Ben Zoma)라는 랍비가 일어나서 말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장 4절 쉐마 말씀이었다. 이 랍비를 이어 다른 랍비가 손을 들었다. 벤 나나스(Ben Nannas)였다.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암송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두번째 랍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금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둘 다 너무도 중요한 구절을 말했다. 그런데 또 한 랍비가 손을 들었다. 벤 파찌(Ben Pazzi)였다. 그는 앞의 두 구절보다 유대교의 정신을 더 잘 요약하는 구절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민수기 28장 4절이었다.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유대교의 참된 정신은 아름다운 시구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서술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타오르는 한 순간의 사랑이기보다는 매일의 삶 속에서 친절을 베푸는 결혼 생활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칭송하는 믿음이기보다는 믿음을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해 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힐렐은 이 세번째 랍비야 말로 유대교의 핵심을 가장 잘 말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두 강령이다. 그런데 이 이상적인 비전이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잡으려면 매일 매일 드려지는 일상의 예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살던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먹고 살기 바빴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전달하게 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9:1) 여기서 ‘섬긴다’는 동사는 ‘아바드(עבד)’인데, 이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이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열가지 재앙을 애굽에 쏟으신 것도 그들을 애굽의 신들로부터 해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세상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백성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출 29:41,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두 마리의 어린 양은전부를 불살라 화제로 드려야 했다. 아무도 드려진 제물을 먹을 수 없었다. 제물을 남김없이 태워 다 드려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갔다.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드린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헌신된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는 의미다.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낭비다. 세상사람들이 아까와하는 시간과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출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드리는 장소, 예배드리는 곳에서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신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우리 인생의 방향의 정해지는 것이다. 출 29: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곳이기에 우리가 예배 드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이 드러나게 된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드리는 제사를 전날 밤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저녁에 드리는 제사를 낮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 이 상번제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오전 9시와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착된다. 그런데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과 숨을 거두신 시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상번제 때 드리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를 섬기는가, 누구를 예배하는가는 우리 삶의 중요한 이슈가 된다. 사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가 못드리는가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삶의 매순간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가이다. 예배는 우리 신앙 생활의 일부가 아니다. 전부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 삶의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매일 드리는 상번제 규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예배하며 그 땅의 문화를 바꿔가길 원하셨다. 예배가 무너지면 그들은 그 땅의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이상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큰 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군대를 강화하고 성을 쌓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저 매일의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예배가 일상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대하고 예배하는 우리의 일상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제사장나라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예배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한국교회는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왜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한국 교회를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여기고 있지 않는 걸까? 왜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까? 그것은 교회인 우리가 매일의 예배, 일상의 예배에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일에는 뜨거운 마음으로 예배드리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서는 예배자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일상에서 예배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매일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예배자가 되길 원하신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세상의 문화에 마음 빼앗기지 않으며,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산제물로 우리를 헌신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드려야 할 영적 예배이다. 매일의 예배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의 사명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이슈가 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정말 회복해야 할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일상의 예배이다. 바쁜 세상에서 하루 중 귀중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분명 낭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낭비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미물에게도 우리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시는 유일한 시간이 된다. 바라기는 숭배할 것이 널려 있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습관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구하고 찾는 예배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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