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8 인생 광야를 통과하려면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5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28 인생 광야를 통과하려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민 2:34)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부풀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갈 수 있겠구나..’ 그들은 하루라도 속히 그 가나안 땅에 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마주친 것은 광야라는 황량한 현실이었다. 광야는 원해서 가게 된 곳이 아니다. 거기서 편히 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 광야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곳이 바로 광야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애굽이라는 옛 시절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직 이르지 못한 가나안을 빨리 가고 싶게끔 만드는 곳이 광야다.

이번 주 토라포션은 민수기서 말씀이 시작된다. 민수기서는 광야 40년의 기록이다. 민수기서는 원래 히브리어 제목이 ‘베미드바르(במדבר)’이다. ‘광야에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광야에 머물러야 했을까?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에 이르는 직항로를 깔아주지 않으셨을까?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때에 광야의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인생의 광야를 마주칠 때 그것을 잘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해변길은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대로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해변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스라엘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 13:17-18,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가나안 땅 해변길에는 블레셋 민족이 버티고 있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아무 준비없이 맞붙으면 아주 많이 얻어 터질 것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을 대로가 아닌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들의 결핍에만 주목하게 되었다. 물이 없고 먹을 게 없어서 아우성쳤다. 애굽 땅 고기 가마 곁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 고기도 주셨다. 광야에서 이전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부족하지 않은 공급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에 토라를 주셨다. 또한 출애굽 1년 후에는 성막을 세우게 하셨다. 그리하여 광야에서도 그들과 함께 동행할 것을 약속하셨다. 성막이 세워지고 한 달 뒤의 시점에서 바로 민수기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민 1: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하나님은 성막이 완성된 뒤 광야 2년차를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구조사를 명령 하신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 군대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노예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민족으로 준비되어야 했다. 노예에서 하나님 나라 군대가 되는 것, 그것은 정말 엄청난 변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파별로 계수된다. 그리고 성막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각 진영에는 그들의 지파를 상징하는 깃발이 세워진다.

민 2: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애굽에 노예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들 수 있는 깃발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함께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감 없는 노예들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각자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개인들도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나라 언약 백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런데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다고 해서 광야를 잘 통과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깃발을 흔든다고 밥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지파별 리더들이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그들의 존재감은 한 순간에 꺾이고 만다. 깃발과 함께 펄럭이던 자존감은 사라지고, 자신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열등감 컴플렉스에 집단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광야에서 우리는 내가 사회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깃발이 있어도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없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갑자기 성공의 대열에서 멀어진 것 같거나,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마주 할  때, 혹은 자녀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우리는 무력감에 빠진다. 무력감이 깊어지면서 염려와 불안이 커진다. 나를 고통스런 광야의 현실로 인도한 모든 것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직장 상사든, 하나님이든, 이러한 상황을 허락했을 것 같은 대상에 대한 불만과 원망도 커진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의도를 헤아려봐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광야로 인도하실까? 광야라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מדבר)’이다. ‘말하다’라는 ‘메다벨(מדבר)’도 같은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백성을 바람난 아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거친 들’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이다. ‘광야’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서 거기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광야 ‘미드바르’는 하나님이 ‘메다벨’하시는 곳, 즉 말씀하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호 2:15-16,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 죽음과 같은 골짜기에서도 소망의 문이 열리게 된다. 광야라는 거친 들에서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남편’이라는 신부의 고백이 회복되는 것이다. 광야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신부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발동되는 곳이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광야의 시간에는 물론 고난과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당신의 백성들과 더 긴밀히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 선포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광야에서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혼돈이 크기 때문이다. 내 안의 탄식과 걱정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음성은 그저 침묵으로만 여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상황가운데 내 속에서는 불신의 목소리가 커져간다. 나에 대한 좌절,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우성친다.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기대보다는 하나님에 대해 독촉하는 마음이 속에서 빗발친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보시죠. 왜 이러한 현실을 내가 맞이해야 합니까?’ 이런 의심 가득한 하소연을 우린 하나님 앞에 내뱉게 된다. 그래서 광야를 걸을 때 보통은 비딱하게 걷게 되는 것이다. 원망이 커져있을수록, 염려와 불안이 커져있을수록,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내면와 외부에서 들리는 말들을 잠재우고 오직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음성은 호세아 말씀처럼 열정적인 사랑의 계시로 우리에게 들려오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기 위해 광야로 불러내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대화하고 광야가운데서 말씀을 주기 위해서 광야를 허락하신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아브라함은 네게브 광야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도 호렙산 광야였다. ‘호렙’은 ‘황무한’이란 뜻이다. 황무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다윗도 그가 왕이 되기 전, 많은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광야는 그의 피난처였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곳이다. 그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다윗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의 시간을 보내셨다. 마귀가 그 유대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 시험한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대응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심령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말씀으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의 시간을 통해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준비되신 것이다. 광야는 이처럼 수많은 성경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된 곳이라 할 수 있다.

광야를 통과하여 그 광야 끝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잠시 상상해보자. 그들은 광야 한복판에서 힘들어 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더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었다. 물론 광야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는 그들의 불신 때문에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세대는 이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만한 군대가 되어 광야 끝에 서 있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자들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헌신된 공동체가 되었고,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하며 하나로 묶여져 있었다. 그들이 혼자 였다면 결코 광야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깃발 아래 함께 협력했고, 성막을 중심으로 함께 행진했기에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부르셨다. 다른 곳에서 별 문제없이 지내다가 이스라엘에 와서 광야의 시간이 시작되는 분들이 종종 있다. 아니 많이 있다. 광야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를 홀로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광야는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절망스러운 곳이다. 내 계급장이 먹히지 않는 곳이다. 과거의 경험이나 경력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광야는 내가 벌거벗고 서는 곳이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 남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된다. 내가 의지했던 우상들이 정리되고 하나님 한 분만 나의 남편으로 남는 곳이 광야다. 다시 주님과 깊은 연합과 사랑의 관계가 타오를 수 있는 곳이 광야인 것이다. 내가 의지했던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광야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광야를 통과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의지하던 것을 다 끊고 그 분 앞에 홀로 서야 한다.

신명기서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목적이 나온다.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광야를 만날 때 그것을 통과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내 판단, 내 기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합리적인 기준까지 내려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관점이 나의 온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광야가 주는 결핍과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베미드바르(במדבר),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진 토라포션은 항상 오순절 바로 전 주간에 읽게 된다. 광야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맞이하는 절기가 바로 오순절인 것이다. 오순절에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받았다. 오순절에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광야를 통과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그들에겐 더 이상 ‘광야’도 없었고, ‘가나안’도 없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가진 자이다.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광야에 있든, 가나안에 있든, 환경이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오순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길 원한다.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회복하길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광야와 같은 현실속에서도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 사랑의 능력으로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는 주의 백성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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