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6 미래를 위한 기억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7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6 미래를 위한 기억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민 33:1-2)

우리는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좋았던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 실수했던 기억이 더 오래 가는 것 같다. 나쁜 기억들은 우리가 원치 않은 순간에 우리 현재의 삶에 불쑥 찾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기억들을 빨리 덮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광야 40년의 시간을 끝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 아벨싯딤에 다다른다. 이제 정말 가나안 바로 코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신다. 왜 한시라도 빨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과거의 여정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기록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기억하기 원하셨다. 이 기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 40번 진을 친다. 광야 40년에 40번이니까 평균 1년에 한번 이사한 꼴이다. 애굽 라암셋에서 모압평지까지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이유는 뭘까? 거기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낮추시는 겸손 훈련의 기간이었다. 광야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순종 훈련의 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시간을 지나면서 40년 만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이들이 어떤 노정을 지나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먼저 이들은 모세의 인도로 라암셋을 떠나게 된다. 라암셋에서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다. 거기서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 애굽과 구별됨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월절 다음 날 이 라암셋을 떠난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광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날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속죄를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유월절이 있고 나서 출애굽이 시작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출애굽도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죄의 노예로 살았던 라암셋을 떠났는가? 여러분의 인생에 대속의 피가 뿌려진 출애굽 사건이 있었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역사 없이 구원의 여정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250만 되는 민족이 애굽을 떠나는 것은 사실 대책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책 없는 일을 믿음으로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나타난다. 출 13:20-21,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큰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의 광야 여정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자 그들은 곧 불신에 빠진다. 그들은 모세에게 대든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 하나님은 이 불신으로 가득찬 백성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그 바다 가운데 엎으시며 큰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홍해를 건너고 사흘이 못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원망에 빠진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한 것이다. 그들은 신광야에서 애굽에서 먹던 고기 생각이 나자 또 원망한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제공해주신다. 그러나 르비딤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그들은 또 다시 원망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게 하셔서 물을 공급해 주신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신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디자 그 새를 못참고 자신들을 인도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이들은 가데스바네아에 이른다. 그들은 거기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낸다. 그 정탐 이후 그들은 집단적 두려움과 원망에 빠진다. 계속되는 원망의 대가는 엄중했다. 불신의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게 된 것이다. 이 후 호르마에서 그들은 고라의 반역으로 만 사천 칠백 명의 백성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싯딤에서는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면서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단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광야에서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역사는 불신의 역사였고, 배역의 역사였다.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고통의 역사였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을 기록해야 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왜 필요했을까?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라는 책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한다. 즉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두고 있었던 미래는 무엇이었나? 그들의 미래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정복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지나온 노정을 열거하신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민 33:51-5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걸어온 노정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이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광야 2세대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로 이끄시기 위해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신 것이다.

한나 모니어는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원래 버전이 아니라 변화된 버전을 저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내용들을 살펴보는 동안에 그 내용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기록된다는 것이다. 모압평지에 살아남은 광야 2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부모 세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반역과 불신, 그로 인한 죽음을 광야에서 지켜보았다. 이들은 염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깊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한 장자 민족으로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광야 40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들이 지나온 노정마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들이 베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통스럽고 아팠던 기억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들에게 광야가 단순히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겸손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들이 거쳐갔던 광야의 노정을 회상하며 그들의 기억은 원래 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전으로 다시 저장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가나안은 사실 의미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을 간직한 채 가나안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인 가나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과거가 다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인생그래프를 그려본 적이 있다. 심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지점들이 있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그 당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지점들이었다. 상처로 남았던 과거였고 아프기만한 과거였다. 그러나 돌아보니 거기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그 내려간 지점은 고통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 시작점이 되었던 것이다. 교만했던 내가 다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불순종했던 내가 다시 순종하게 되는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은혜였다.

신 9:6-7, “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나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은 자들이었다. 틈만 나면 불신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들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이 곧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곧은 목을 쳐서라도 가나안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빨리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된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기억을 위한 시간이었다. 불신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이를 그들은 광야에서 경험했다. 인생의 광야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 간 사람에게만 가나안은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하나님의 의도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가나안 땅에서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된다. 그래서 광야의 노정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가나안이 주어져도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각자 인생의 광야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은 시퍼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픔을 단순히 고통으로 기억해선 안된다.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그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해야 한다. 한나 모니어는 다른 기억은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감정과 연결된 감정기억은 그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기 보다는 과거의 고통스런운 기억에 매이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기억, 아픈 관계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노정 어느 지점에 여전히 자신의 인생이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거의 기억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는가? 가나안이 여러분의 눈 앞에 있는데 거기에서 머뭇거리고 있지 않는가? 미래를 위한 싸움을 준비하지 않고 과거와의 씨름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포로로 끌려간 민족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음과 같이 애가를 불렀다. 애 3:19-24,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진노 중에라도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는 그의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처음엔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낸다. ‘내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그것을 회상했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보며 그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다는 사실에 다시 소망을 갖는다. 주님의 성실하신 사랑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게 되길 축원한다. 우리가 이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과거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우리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고통에 머물지 않고 우리 미래를 향한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과거 여러분이 지나왔던 광야의 노정을 믿음으로 재평가 할 수 있길 바란다. 그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치유받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나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곳에서 여러분이 싸워야 할 전쟁을 감당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된 미래를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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