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3 믿음의 상속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0월 3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3 믿음의 상속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18-22)

이건희 삼성 회장이 별세했다. 18조가 넘는 그의 주식 재산은 이제 그의 자녀들에게 상속될 예정이다. 국가에 내야 할 상속세가 11조원이나 된다고 하는데, 재벌들 걱정은 우리가 안 해도 될 것 같다. 앞서 사신 분들이 이루어 낸 유산을 상속 받는 것은 귀한 일이다. 우리는 보통 자녀라는 한가지 이유로 부모 세대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상속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누굴까? 아브라함이다. 전 세계 1700만명의 유대인, 18억의 무슬림, 21억의 기독교인, 도합 40억의 사람들이 그의 믿음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과 혈연적 관계가 없다 해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따르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실로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은 이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복을 상속 받는 믿음의 자손이 될 것인가? 오늘 아브라함에 대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부터 아브라함에게 기가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결론적인 진술이다. 아브라함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의 믿음도 처음에는 우리와 그닥 다르지 않았다. 그가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그 이전이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는 자식이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실패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실패자였다. 그런 그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래서 떠난 것이다.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 사실도 우리를 기죽게 한다. 그러나 이것도 아브라함의 100세 때 믿음에 대한 결론적인 진술이다. 아브라함도 이 믿음 이전에는 숱한 의심과 불면의 밤을 보냈다. 가나안 땅에 온 지 10년이 다 되도록 그는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창 15:2,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반문했다. 창 15:3,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그의 이 말에서 자식없이 보낸 그의 슬픔이 느껴진다. 갈대아 우르에서나 가나안에서나 그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여전히 그는 자식이 없는 실패자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허송세월 보낸 것은 아닐까’ 그는 의심하며 미래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고민하는 그를 이끌어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셨다. “아브라함아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봐라” 밤하늘의 별들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동안 땅만 바라보고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깨닫게 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대사가 들려오는 듯하다. 욥 38:31-33,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욥은 하나님께 설득되었다. 욥의 믿음은 그렇게 하나님께 설득된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욥은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욥 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2:2-3,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자각하며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욥처럼 하나님께 설득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믿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처럼 그저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털어 놓는 것이다. 나를 좀 설득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작하는 게 믿음의 여정이다.

하나님은 실망감으로 가득했던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 별과 같을거야”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믿음이 생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이 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축복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다. 하나님 자신이었다. 맹목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그는 설득된 것이다. 믿음은 암울한 현실의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때부터 14년이 지난 99세까지 이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로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근거가 이제는 더이상 자신들로부터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상황을 보면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 대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진정한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믿음의 근거가 자신들이 아니라,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표현한다. 여기서 ‘의’는 영어로 ‘righteousness’로 번역한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영접 과정을 통해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칭의 교리’로 발전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의’는 히브리어로는 ‘쩨다카(צדקה)’이다. 구약은 분명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쩨다카’로 여기셨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쩨다카가 무엇인지 알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쩨다카’는 요즘 유대인들에게는 ‘구제’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구제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랍비들이 ‘공의’라는 뜻의 ‘쩨다카(צדקה)’를 구제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해야 할 유대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쩨다카’는 ‘구제’보다 더 넓은 의미가 있다. ‘쩨다카’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의로운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신다. 창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의’가 바로 히브리어로 ‘쩨다카(צדקה)’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다른 것이 아니라, ‘쩨다카’가 상속되는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던 것이다. ‘쩨다카’는 언약 백성으로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복이 천하 만민에게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쩨다카’의 가장 큰 특성은 그것이 한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 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원어로는 ‘쩨데크, 쩨데크(צדק צדק)’라고 두 번 반복하면서 ‘너는 그것을 뒤쫓으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쩨다카는 한방에 끝내는 미션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서 추구해야 하는 사명인 것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한번 입으로 시인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100% 따르기까지 추구해야 할 평생의 습관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눅 3:7-8,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대에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돌들’은 ‘아바님(אבנים)’이고, ‘자손’은 ‘바님(בנים)’이다. 하나님은 ‘아바님’으로 ‘바님’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언어유희를 통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질타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하는 무리들에게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눅 3:11)” 세리들에게도 말한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눅 3:13)” 군인들에게도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눅 3:14)” 한마디로 ‘쩨다카,’ 공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의로운 삶을 추구하고 행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살라는 것이다. 부과된 것 외에 거두어 이익을 챙기는 것이 당시 세리들의 관행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이 당시 군인들의 관행이었다. 관행은 관성을 지녔기에 그것을 뒤집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관행을 뒤집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기준, 쩨다카를 다시 세우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해야 하는 사명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하여 믿음을 갖지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저런 게 기독교라면 차라리 믿지 않겠다고 그분들은 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잘못된 믿음을 가르쳐왔던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해 왔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죄가 용서되고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다. 수많은 죄인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성지로 가서 이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또한 면죄부를 사면 천국이 보장된다고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천국에 가기 위해 면죄부를 샀다. 잘못된 믿음은 반드시 교회를 타락시킨다. 중세 교회는 그렇게 타락했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우리만의 신념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영접 기도 한 번 한 것으로 나의 의가 완성되고 천국이 보장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봐야 한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공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손해나 핍박이나 생명의 위협을 걸고 고백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입으로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그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고 말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고 말했다. 우리는 단순히 칭의 교리를 아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자신해선 안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일까? 누가 그의 복을 상속 받는 믿음의 자손이 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은 여전히 언약을 따라 할례 받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재정의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 것은 그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할례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꼭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할례 없는 이방인들의 조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논거를 제시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은 바울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해석한 것이다.창 22:17-18,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여기서 씨는 히브리어로 ‘제라’인데, 그것이 단수로 씌였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자손들’이 아니라 자손 한 사람, 즉 그 씨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바울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의 유업을 상속할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유업을 상속받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한 순간의 고백이 아니라 평생 확장시켜야 할 습관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믿음의 습관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랍비 로렌스 호프만(Rabbi Lawrence A. Hoffman)은 이렇게 말했다. “Faith is the habit of seeing purpose and meaning where others see emptiness and chaos.”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공허와 혼돈을 보는 곳에서 목적과 의미를 보는 습관이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습관을 통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음에도 하나님이 생명의 씨를 주실 것을 믿었다. 소중한 아들 이삭을 얻은 뒤에도 그를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확장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롬 4:23-24,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이 말씀처럼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속한 자들이 이 땅에 세워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쩨다카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믿음을 상속받길 바란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습관을 확장해감으로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며, 100% 순종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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