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11 예수의 마음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2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1 예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5)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있다. 올 해만큼 한 해를 송두리채 돌이키고 싶었던 해는 없었던 것 같다. 무를 수만 있다면 다 환불 받고 싶은 게 올 한 해라는 시간이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이 상처와 후회로 남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뭘까?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올 한해 여러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은 무엇이었나? 오늘 말씀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며, 혹 우리 안에 고통스런 감정이 남아있다면 그것을 정리하는 은혜가 있길 원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마음이 뭘까? 먼저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여기서 자기를 비웠다는 말을 영어성경(NKJV)은 “But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자랑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것이다. 헬라 문명에서 낮은 자리에 취하는 것, 즉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노예들에게 강요된 굴종의 태도였다. 시민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뽐내고 경쟁해서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당시의 미덕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최대한 입증하고 자신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다. 하나님의 본체였던 그분은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하여 혈과 육을 지닌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한없이 낮아지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영광 받고 군림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 분의 마음은 십자가에 있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십자가는 고통이 따르는 자리다. 그러나 자신이 고통 받더라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에 휩싸이셨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결정한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고통스러웠던 감정은 더이상 고통이기를 멈추게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요셉이 고생 끝에 형들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인생이 내려가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요셉의 인생이 한없이 내려가기만 했을 때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요셉이 당한 것을 다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형들에 의해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다. 거기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13년 동안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가족과 헤어져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요셉의 마음은 형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애굽의 2인자가 되어 충분히 복수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러한 감정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형제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45:5, 7-8,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요셉은 자신이 처음 느꼈을 비통함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따뜻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자신을 형제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에 요셉의 고통이 멈춘 것이다. 그의 과거가 정리되고 그가 받았던 상처가 더이상 상처로 남지 않게 된 것이다.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제들은 요셉이 복수 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그 때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요셉은 그의 과거 전체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더이상 자신을 형제들에 의해 희생 당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사명을 맡은 자로 보았다.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던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가 그의 과거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평가할 수 있었기에 그는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매여 살지 않았다. 그가 만약 과거를 재평가 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미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구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꿈으로 그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요셉의 성공은 그가 총리가 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그 긴 고통의 시간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거둔 진정한 성공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제국 아래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벧후 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도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은 성공이라는 화려한 영광속에서는 개발되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고난이 왜 필요할까? 왜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의 큰그림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욕심과 관심사에 붙들린 삶을 산다. 땅에 것에 매여 산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삶의 방향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큰 그림에 관심을 갖게 하시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요셉은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애굽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고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이 하나님의 큰 그림을 봐야한다. 그래야 우리가 하는 고생이 개고생이 되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도 가볍게 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우리의 고통스런 감정은 정리되고, 과거의 상처는 더이상 고통이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펼쳐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라고 성경을 펼쳐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너무 빨리 환경을 원망해서도 안되고, 너무 빨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원수로 규정해서도 안된다. 환경과 사람이 나를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단련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인생은 물론 예수님처럼 스스로 선택해서 내려간 인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한없이 내려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의 지나간 시간들을 재평가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의 인생에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이 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많은 백성을 기근에서 구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원수 같았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십자가를 감당했던 예수님께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이 있다.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영광의 자리로 이끄셨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지극히 낮아질 수 있다면, 결국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면, 우리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 영광의 무게를 겸손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정리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이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큰 그림에 복종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상처 받지 않는다. 이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과거에 받았던 상처도 별이 된다. 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과거를 해석해야 과거가 정리 되고 비로소 미래가 보이는 것이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우리 모두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길 바란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감당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영광의 무게도 감당하는 자가 된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부어져서 고통이 고통이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큰 그림이 펼쳐지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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