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19 끝자리 이웃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2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9 끝자리 이웃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4:7-9)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락다운 기간 동안 아내는 키보드를 정원에 내놓고 매일 예배를 드렸다. 그 소리가 이웃 담장을 넘어갔는지 옆집 유대인 아저씨가 지난 주 저희 집에 찾아왔다. 정원 일을 하면서 그 찬양소리를 들으며 너무도 즐겁게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무 묘목 6개를 교회 앞마당에 심어주고 갔다. 유대인 아저씨의 열린 마음이 교회에 심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묘목을 심는 동안 아내가 잡채와 삼각김밥을 만들어서 주려했는데, 자신은 코셔를 지킨다고, 코셔 음식을 위해 자신은 가스불도 따로 사용한다고 하며 사양했다. 식사 자리에 초대하며 유대인과 이웃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누가복음 본문에는 청함에 대한 비유가 연속적으로 세 번 나온다. 각각의 주제는 조금 다르지만 ‘청함’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4: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예수님께서는 식사 자리에 초청받아 가신 듯 하다. 거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신 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 14:8-9,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어디서든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높은 자리에 앉고 싶지 끝자리를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청함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도가 뭘까? 그것은 단순히 식탁 예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혼인 잔치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천국 잔치를 상징한다. 잔치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지는 손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율법의 의로는 자신들이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달랐다. 예수님은 11절에서 말씀하셨다.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하나님 나라에서는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 옆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 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이 말씀은 실제로 식사 자리에 형제나 친척이나 부자 이웃을 초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14:13-14,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이 말씀도 잔치에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만 초청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두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눈으로 보이는 현실 세계이고, 또 하나는 부활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다. 현실 세계가 전부인 사람은 현세에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산다. 그래서 나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잘 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마음을 쏟게 된다. 반면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마음을 쏟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의 의도가 뭘까? 그것은 우리의 현실속에서의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보상해주시는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모르게 행한 선행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쏟지 않는 대상들, 나에게 아무 보상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며 조용히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관심이 이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큰 잔치의 비유를 하신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이 여러 변명을 하며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비유다. 그들의 변명은 이렇다. ‘나는 밭을 사서 나가 봐야 해’ ‘나는 소 열 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해’ ‘나는 장가 들어서 가지 못하겠어’ 그러자 주인은 종들에게 명한다. 14:21,23-24,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초청 대상이 어떻게 당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대상에게까지 확대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서 당시 사람들이 멸시하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 대상은 이처럼 사회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는 사회의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예외없이 초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테루마(תרומה)’이다. 테루마는 ‘올려 바친 예물’이란 뜻이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는 성막을 짓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기 위해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משכן)이다. ‘거하는 곳’이란 뜻이다. 동사 ‘샤칸(שכן)’은 ‘거주하다’라는 뜻이고, 명사 ‘샤켄(שכן)’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 즉 ‘이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가까이서 함께 사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을 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 말씀처럼 하늘이 보좌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따로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시다. 사실 무한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이 땅에 유한한 공간을 만든다는 개념 자체가 모순이다. 그렇다면 성소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이 말을 원어로 보면 이렇다. “뵈아쑤 리 믹다쉬, 뵈샤칸티 베투캄” (ועשו לי מקדש ושכנתי בתוכם)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그 건축물에 거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를 마련하기 위해 자원하여 테루마를 드린 사람들의 마음에 거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소를 지으라는 명령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장소를 자원하여 마련하라는 초청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다. 나중에 너무 많이 가져오자 모세는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성막이 완성되어 봉헌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 완성된 성막에 충만했다. 특히 지성소 속죄소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쉐키나’라고 한다. ‘샤켄’이 이웃이라는 뜻인데, 쉐키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 가운데 거주할 때 나타난 영광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우리는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처럼 사회의 끝자리에 있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길 원하신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끝자리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아무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자원하여 드리는 시간과 물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아낌없이 드렸던 테루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아니 베쩨덱 에헤제 파네카 (אני בצדק אחזה פניך)” 이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쩨다카, 즉 공의를 베푸는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25:40, “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사회의 끝자리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가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잠언은 말한다.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끝자리에 있는 이웃에게 베푼 것은 우리가 돌려받기 힘들다. 그들이 베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행위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꼭 하나님께 돌려받으려고 선을 행하는 게 동기가 되어선 안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끝자리 이웃들에게도 우리의 사랑을 나눠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인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인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10:3,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백성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리라하나님이 거하실 성소를 위해 아낌없이 테루마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으로 함께 하셨다.우리 역시 하나님이 아끼시는 끝자리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시간과 물질을 드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테루마가 될 것이다. 바라기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이 땅의 가치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여전히 땅에 살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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