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21 남겨진 안식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3월 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1 남겨진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4:9-10)

여러분은 지금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안식’이란 책을 쓴 랍비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이 “내세를 미리 맛보라고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안식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매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4:8-9,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누릴 수 있었던 안식이 무얼까? 그것은 일차적인 의미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적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안식의 전부였다면 다른 안식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당부한다.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저 안식’이 뭘까?

우리는 11절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결과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현실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물 한 방울 먹을 수 없는 광야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주목했던 것은 거인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의 현실이었다. 현실을 바라 본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 간 모세를 기다릴 수 없었다. 현실을 보니 모세도, 하나님도 믿고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할 신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안식을 얻으려 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바로 이 금송아지 사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을 압박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철저히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불신앙은 결국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찾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로 빠지는 길이다. 왜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이 되었을까? 당시 애굽 사람들은 아피스(Apis) 황소를 신성시하며 숭배했다. 그 송아지가 풍요와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 있었을 때 이 아피스 황소를 섬겼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다시 그들에게 익숙했던 신을 찾았다. 힘과 번영을 약속하는 금송아지 형상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욕망에 맞춰 재구성했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단지 자신들에게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4:1-2,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이전에 보고 들은 것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과거 체험했던 하나님을 그들의 일상 속에서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역시 복음을 받은 자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은 결과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자들이다. 태초에 계시던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홍해가 갈라진 것보다 더 큰 기적을 믿는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속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기로 고백한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현실 때문에 다른 우상들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그 우상 속에서 안식을 찾으려 해선 안되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금송아지 사건 바로 전과 후에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한마디로 안식일이 번영을 숭배하는 인간 문제에 대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35:1-2,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 우리는 일을 멈춘다. 돈과 소비가 목적이 되어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았던 삶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회에서는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공동체라는 의식을 새롭게 한다. 우리는 이 날 함께 말씀을 듣고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없는 것으로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회복한다. 따라서 안식일은 더 소유해야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소비주의 사회로부터 영적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안식일을 통해 이 세상에서 누가 참 신인가를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된다.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소유와 성취에 대한 염려와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안식일을 지킴으로 세상의 지배 가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안식일을 통해 번영을 약속하는 우상의 미혹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안식을 온전히 누려야 한다. 그래야 한 주간의 일상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게 된다. 보이는 우상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안식일은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꼬박꼬박 잘 지킨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저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모든 일을 멈춤으로 안식을 추구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 안식일에 일한다고 비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을 무시했던 계명 파괴자일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의 죄 문제를 다루셨다.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면서 그들 평생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안식을 누리도록 해주셨다. 안식일의 본질이 단순히 일을 멈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류의 깨어진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11:28-30)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도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한 뒤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히브리 기자가 이야기 하는 우리에게 남겨진 안식인 것이다. 구약 시대 은혜의 보좌(mercyseat)는 염소의 피가 뿌려지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던 곳이다. 신약 시대 은혜의 보좌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은혜가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 안식에 들어가야 우리 삶에 갈등이 없어진다.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 분의 사랑이 부어지며 다른 사람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밧(שבת)이란 말은 ‘멈추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을 멈춤으로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안식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샤밧(שבת)은 ‘슈브(שב)’와 ‘타브(ת)’가 합쳐진 단어다. 슈브는 ‘돌아가다’는 뜻이고, 타브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십자가로 돌아갈 때 샤밧, 안식이 있음을 이 글자는 보여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류의 안식은 에덴동산에서 깨어졌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탐욕과 본능에 이끌렸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를 끊으시고 다시 인류가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신 것이다.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예수님을 통해 그분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안식의 모형일 뿐이다. 즉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진정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모형인 것이다. 믿음을 결부하여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려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아니했던 본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문자적으로 모든 일을 멈추는 게 안식의 본질이 아니다. 불안한 내일에 대처하기 위해 내가 세운 우상들을 버리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안식인 것이다.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안식의 본질인 것이다. 


쉴 새 없이 달려 왔던 세상이 지금 팬데믹으로 인해 거대한 멈춤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이 멈춤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누가 시간의 주인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성공과 번영으로 미혹하는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안식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을 통해 안식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광야와 같이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을 일으켜 우리에게 남겨진 안식에 다 이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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