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23 나의 부르심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3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3 나의 부르심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5-7)

평생 자신의 직업을 소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있다. 물론 직업과 소명이 일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부르심의 개념은 단순히 어떤 특정 직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부르심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해도 온 열정을 다하여 그 일을 감당하려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삭개오의 직업과 그의 소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부르심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삭개오의 직업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다. 당시 여리고는 북쪽으로 다메섹, 서쪽으로 가이사랴, 남쪽으로 애굽을 연결하는 교차로였으며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헤롯의 여름 별장이 있었고 유대 땅에서 가장 비옥한 곳이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세금 수입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삭개오는 그 도시에서 세리들을 관리하던 세무소장이었다. 성경은 그를 부자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몫으로 챙기는 수입이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특정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는 일을 가장 높은 입찰자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렇게 임명된 사람은 세금 징수에 대한 봉급을 따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액수를 세금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리하여 세리장은 로마제국에게 바쳐야 할 총액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몫으로 챙길 수 있었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 권력에 빌붙어 동족의 수입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을 보며 유대인들은 얼마나 그들을 증오했을까?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했던 직종의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사람들은 ‘삭개오’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다. 당시 세리장 삭개오의 직업 소명은 무엇이었을까? 가능한 많은 세금을 거둬내는 것,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는 직업인 삭개오는 그의 재산이 늘수록 동족 유대인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는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소명 없이 돈만 버는 직업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렸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우던 예수님이었다. 친구없이 살아가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너무도 궁금한 존재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사람들이 그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는걸까?’ 그는 궁금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서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BTS같은 아이돌급 환영이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결정적으로 그의 키가 작아서 볼 수 없었다. IVP 성경주석은 그의 키가 150센티 미만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위로 올라간다. 그 순간 그의 감정이 어땠을까? 겉으로 드러난 흥분, 기대감 외에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도 있었을 것이다.

자,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눅 19:5절을 보자.예수께서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이 나무 위의 삭개오를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BTS 어느 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놀라서 까무라쳤을 것이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무도 내 집에 방문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은 삭개오에게 천상의 멜로디가 되었을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삭개오는 다만 하나의 죄인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삭개오는 예수님께로 와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다.

삭개오는 그곳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결심을 표명한다.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우리 삭개오가 변했다. 우리도 동시대에 살았다면 충분히 죄인 취급했을 삭개오가 예수님의 불러주심에 이렇게 변화된 것이다. 부자 삭개오는 그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한다. 그는 더이상 죄인으로 돈만 버는 세리장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자신의 소명을 찾게 된 것이다. 회개한 삭개오는 비로소 소명이 있는 직업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의로운 세리장이 된 것이다.

삭개오의 변화를 보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눈에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다. ‘잃어버린’이란 헬라어로 ‘아폴로로스(ἀπολωλός)’이다. ‘파괴된, 손상된’이란 뜻이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 당하면서 그의 자존감은 파괴되었다.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아무 소명없이 돈만 벌던 그의 내면은 사실 깊은 균열과 함께 손상되었다. 키까지 작았던 그는 열등감 덩어리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단절된 채 그나마 돈이라는 안전지대 속에 숨어 살았던 그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자’였다. 예수님은 외로움 속에 숨어 있던 그를 부르셨다.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삭개오를 인정해주셨다. 구원은 그렇게 삭개오에게 임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오랫동안 숨어있던 자리에서 나왔을 때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한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소제목은 ‘봐이크라(ויקרא)’다.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란 뜻이다. ‘봐이크라’는 전체 레위기서의 히브리어 제목이기도 하다. 레위기는 이처럼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우리는 성막이 준비된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는 아무도 성막 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레위기서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주셨을 때 모세는 비로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레위기의 주제는 ‘친밀함으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는 많은 희생제물에 관한 규례가 나온다. 그것이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규례들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며 별로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레위기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희생제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קרבן)’이다. 그런데 이것은 ‘카라브(קרב)’에서 온 단어다. 카라브는 ‘더 가까이 가다’는 뜻이다. 따라서 희생 제물인 코르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수단인 것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때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손상된 우리의 심령은 치유를 경험한다. 파괴된 관계들은 다시 회복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에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원죄 아래 태어난 우리들은 사실 모두가 잃어버린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우리는 손상을 경험한다. 우리는 또한 나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 때문에 자아의 균열과 파괴를 경험한다. 우리도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들이다. 어느 정도 이웃과 단절되어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 숨은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리를 들을 때이다. 여기 있는 우리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작은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시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찾는 것이 바로 소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은 우리 인생 소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소명없이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일하는 직업인과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인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부르심’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모세에게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탄식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이들의 소명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시작되었다. 그 소명 앞에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소명 앞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환경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고 편지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직업과 관련된 부르심보다 더 근원적인 부르심이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9:13-15,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 즉 코르반이 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통해 손상되고 파괴된 우리의 삶이 구원을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희생이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여기서 말하는 부르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라는 부르심인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할 때, 나의 정체성이 회복되며 손상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삭개오처럼 숨었던 곳에서 나와서 나의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라는 부르심은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하는 부르심보다 앞서서 응답해야 하는 부르심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3:20-22,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다. 여러분이 ‘귀 있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 살기를 바란다. 소명 없이 사는 자가 아니라 소명을 발견한 자로 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이루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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