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47 아버지의 노래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9월 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7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15:31-32)

잃어버렸던 물건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 있다. 아내가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하도 잘 잃어버려서 그것을 찾아주는 기쁨을 나는 종종 누린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비유로 나온다. 잃은 양을 다시 찾은 기쁨,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다시 찾은 기쁨, 그것에 이어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왜 하신 걸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을 보면 이 비유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나온다.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고 이 비유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오해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고쳐주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잃어버린 죄인이 다시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하늘 아버지이심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여주기 원했던 것이다

이 비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15:11-13, “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제 아버지가 필요없다는 선언이다. 아버지와 상관없이 살겠다는 아들의 선언에 아버지는 묵묵히 재산을 나눠주며 그 요구를 들어준다.

이 둘째 아들의 선택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사탄은 매일 우리가 둘째 아들의 선택을 하도록 유혹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라고 속삭인다. 너의 권리와 욕망을 따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면 신세계가 열린다고 유혹한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거절하겠다는 선언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먼 나라로 가게 된다. 거기서의 현실은 어땠을가? 본문은 그의 삶을 ‘허랑방탕,’ ‘낭비’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그야말로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는 탕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유를 찾아간 먼 나라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궁핍이었던 것이다. 그는 삶이 힘들어지자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달려가 맞이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힌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긴다. 아들로서의 그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자. 15:24,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큰아들이었다. 큰아들은 화가 났다. 집을 떠나 탕자로 살았던 자기 동생도 못마땅하지만 사실 아버지에게 더 화가 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15:29,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아들은 탕자인 작은아들과 그를 위해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큰아들은 누굴 가리키고 있는 걸까? 그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큰아들과 같다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장자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없이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포로시대 이후 생겨난 그룹이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이 바벨론 포로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이들은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율법주의자가 되어갔다. ‘율법주의’는 매사 하나님 앞에 실수 없이 바로 서 있어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 하나라도 어기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율법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 남들에게도 자신들이 정한 율법의 조항들을 들이대면서 그러한 삶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했던 것이다.

율법에 철저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늘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죄인과 세리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에 분노했다.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큰아들은 누구보다도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지만 사실은 둘째 아들보다 더 먼 나라에 있었던 것이다. 이 비유에서 정말 돌아와야 할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있던 큰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대사를 들어보자. 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너무도 기뻤다. 큰아들에게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향해 즐거워 부르는 노래 소리를 그는 듣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기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노래하시는 분이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예수님은 이 하늘 아버지의 노래,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배신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로 사셨다. 그리고 끝까지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며 순종하는 아들로 사셨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기까지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사셨기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외치며 그의 소명을 완수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를 들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다 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사는 아들이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삶을 낭비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먼 나라에 가서 고생했던 둘째 아들처럼 살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자기의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며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던 큰아들처럼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누가복음의 비유 속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교회의 역사 때문에 둘째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 화가 나있다. 유대인 600만이 죽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사실 무신론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그들은 이렇게 반문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마음은 딱딱히 굳어진 채, 비록 여전히 절기를 지키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먼 나라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누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노래를 들려 줄 수 있을까?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이번 주 화요일에 유대인들의 신년 ‘로쉬 하샤나(השנה ראש) ’가 시작된다. 유대인들이 새해에 주고받는 인사가 이렇다. “레샤나토바 티카테부 베테하테무 (ותחתמו לשנה טובה תכתבו)” “복된 새해를 위하여,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기를!”이란 뜻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신년부터 대속죄일까지 열흘 동안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이 열흘 간의 기간을 야밈 노라임, ‘두려움의 날들’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누그러 뜨리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믿는다. 테슈바(회개), 테필라(기도), 쩨다카(구제)다. 그래서 이들은 신년 열흘 동안 회당에 가서 참회기도문을 열심히 낭송한다. 친구나 가족들에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또한 이 기간동안 구제금을 많이 낸다. 그들은 이처럼 신년에 잔치 대신 회개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만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만큼 회개해야 의인이 될까? 얼만큼 선행을 베풀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신년에 선행과 회개에 힘쓰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매년 집단적으로 ‘율법주의’라는 옷을 갈아입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신년에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절대로 우리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바울은 말한다. 3:28-29,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통해 탕자와 같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잃어버린 작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 부르시는 아버지의 노래를 그들은 듣지 못한 것이다.

신년의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의에 따라 심판하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돌아오기까지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유대인의 신년에 우리 모두가 이 아버지께 돌아오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가 한 상에서 잔치하는 것,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바램일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새  옷을 입혀주시고 잔치를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이 구원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충만히 이루어지기 위해 하늘 아버지의 장자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넘어져 있다. 먼저 장자된 그 아들을 일으켜 주는 것, 잃어버린 큰 아들을 다시 찾는 것, 나는 그것이 오늘날 이방인 교회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바라기는 그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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