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9 꿈의 대가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1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9 꿈의 대가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37:9-11)

피터 맥윌리암스 (Peter McWilliams)라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Be willing to be uncomfortable. Be comfortable being uncomfortable. It may get tough, but it’s a small price to pay for living a dream.” “기꺼이 불편함을 택하라. 불편함을 편하게 생각하라. 그것이 아마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은 대가이다.” 꿈이 있는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그것은 불편함이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워도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참아야 하는 시간이 있다. 성경에서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불편함을 견뎌내었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오늘은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그가 어떤 대가를 치루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했던 아들이었다. 아버지 야곱은 그를 위해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 아버지가 요셉만 편애했기에 다른 아들들은 그를 미워했다. 요셉은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두 번의 꿈을 꾼다. 첫번째 꿈은 추수하는 장면이었다. 요셉이 형제들과 함께 추수를 하는데, 자신이 묶은 곡식 단이 일어서자, 다른 형제들이 묶은 곡식단이 거기에 절하는 것이었다. 형들이 알면 분명 기분 나빠 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형들을 불러 말한다. 요셉은 순진하긴 하지만 좀 눈치가 없는 캐릭터인 것 같다. 그 꿈을 들은 형들은 “네가 우리 왕이 되겠느냐”라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요셉은 이어서 두번째 꿈을 꾸게 된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지난 번 형들의 반응을 눈치챘다면 요셉은 그 꿈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요셉은 이번에는 형들과 아버지까지 불러 말한다. 그것을 들은 야곱은 요셉을 꾸짖는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요셉의 형들은 꿈을 거듭해서 꾸는 요셉을 시기한다. 아버지 야곱은 비록 그를 꾸짖었지만 요셉의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해 둔다.

요셉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의 꿈은 그가 이루고 싶어서 설정한 목표가 아니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이루고 싶은 하나님의 꿈이었다. 그 꿈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장차 일어날 예언적인 꿈이었다. 요셉이 꾼 꿈이 현실에서 바로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그러나 그 꿈은 요셉의 삶을 형통이 아닌 고난으로 인도한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도단에 이르렀을 때, 형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말한다. “야 저기 꿈 꾸는 자가 온다. 자, 우리가 그를 죽이고 구덩이에 던지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보자” 형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던진다. 꿈 때문에 요셉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결국 요셉은 미디안 상인에게 은 이십에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간다. 그는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하루아침에 노예가 된 요셉의 멘탈은 탈탈 털렸을 것이다. 요셉은 그 지점에서 자신이 꾸게 된 꿈을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그 꿈이 이루어질까?’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더 크게 벌어졌다.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클수록 사람들은 낙담하게 된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순간 그에게 찾아왔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 39:2)”고 기록한다.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는데 그의 감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그 꿈이 너무도 분명히 그의 마음에 새겨졌기에 그는 원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그 꿈에서의 비전을 다시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꿈이 있는 한 그는 버려진 자가 아니었다. 이처럼 꿈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요셉은 원망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꿈 때문이었다. 요셉의 감정은 복수로 이글거리지 않았다. 꿈 때문이었다. 요셉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졌다. 그것이 그를 보디발의 집에서도 형통한 자로 만든 것이다. 보디발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게 된다. 보디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심을 본다. 결국 그는 요셉을 그의 가정 총무로 삼고,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한다.

자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밤마다 요셉에게 눈짓을 하고 동침하기를 청한다. 요셉은 은밀한 유혹을 아무도 모르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현실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그의 아내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꿈은 히브리어로 ‘할롬(חלום)’이다. 본래 의미는 ‘견고하게 묶다’라는 뜻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과 이 꿈을 통해 견고하게 묶여져 있었다. 이처럼 요셉의 꿈은 현실의 욕망 너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했다. 반면 꿈이 없었던 유다는 현실의 욕망을 따라 살았다. 창세기 38장에서 우리는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동침하고, 또 변장한 자신의 며느리와도 동침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을 간직했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보디발의 아내는 아무도 없을 때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할 것을 원했다. 옷을 얼마나 세게 붙잡았던지 요셉은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간다. 요셉의 옷이 또 벗겨졌다. 불길한 징조다. 그는 이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요셉은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인해 고소 당하고, 죄인이 되어 처벌 받았다. 이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였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이 없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그저 무거운 짐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옷이 벗겨지고 수치와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아와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온전한 순종의 길을 가기 위해 때론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감옥에서도 요셉은 그가 꾸었던 꿈을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은 꿈과 더 멀어졌다. 그러나 꿈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절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꿈에서 본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죄수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에게 절하는 존귀한 자로 살았다. 꿈이 있는 한 그는 결코 감옥에 갇힌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와 함께 하셨다. 간수장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 그리고 그를 믿고 감옥의 제반 사무를 모두 그에게 맡긴다. 그는 감금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꿈을 꾸게 된 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고,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꿈은 그를 화려한 궁전이 아닌 고난의 길로 인도했다. 꿈은 그를 시기와 배신과 감금의 시간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었건, 감옥에서 죄수로 있었건 하나님의 통치는 그를 통해 임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한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부어졌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있던, 바로의 궁전에 있던, 그것이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갇힌 감옥에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들어온다. 감옥에 들어온 그 두 사람은 꿈을 꾸게 된다.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준다. 요셉은 감옥에서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하며 살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를 돕는 자로 살았다. 결국 그것이 그가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결정적인 연결점이 된다. 요셉의 해석대로 술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그의 직분을 회복하게 된다. 요셉은 그에게 ‘당신이 잘 되면 나를 생각하고 바로에게 내 사정을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번 주 파라샤는 이렇게 끝난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참 맥이 빠진다. 요셉은 2년의 시간을 더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는 2년 더 잊혀진 존재로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이 없는 사람에게 이 2년이란 시간은 불필요하고 끔찍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요셉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 찼을 때 요셉은 결국 바로 앞에 서게 된다. 2년 더 갇혀졌던 시간은 요셉에게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에 주목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원망하며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감옥에서 끝났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술관원을 원망하며 살았다면 그가 바로에게 갈 수 있는 기회는 닫혔을 것이다. 원망은 기회의 문을 닫는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기회의 문을 여시는 분이다.

만약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기에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고난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여러분은 그래도 요셉처럼 꿈 꾸는 자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고난 없이, 꿈 없이, 현실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꿈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꿈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찾고 그 꿈을 꾸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삶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6:38-39,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비전 때문에 요셉처럼 은 삼십에 팔리셨다.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셔야 했다. 예수님은 죽음의 잔을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 고난의 시간을 순종으로 감당하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다 이루는 삶을 사셨던 것이다.

이전 주에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해 은행을 갔다. 요즘 이스라엘 은행들이 자금 추적을 철저히 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은행 계좌 열기가 까다롭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 갔다. 일요일에 갔는데, 은행원은  약속을 잡고 다시 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화요일에 약속을 잡고 다시 갔다. 나는 분명 고객으로 그곳에 갔는데, 그들은 나를 범인 다루듯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들의 연속되는 질문에 마치 내 옷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결론은 자기들이 좀 더 조사해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연락 안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은행으로 갔다. 거기서는 많이 안 물어봤다. 그리고 30분 만에 계좌를 만들어 주었다. 그 날 멘탈이 좀 털리기는 했지만 내가 은행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내 비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0년 전 하나님은 나와 아내에게 꿈을 주셨다. 그것은 성전의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 물고기가 살아나는 꿈이었다. 그 강가에 고기를 잡기 위해 어부들이 서는 꿈이었다. 아내는 실제로 그물에 은색 물고기가 팔딱거리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이 비전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옷이 벗겨지는 것같은 시간들도 견디고 버틸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꿈과 함께 우리의 삶에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다. 희망을 안고 시작한 결혼 생활, 꿈과 함께 시작한 직장 생활이 의외로 감금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형통한 삶이 펼쳐질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내가 갇히는 듯한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 감금의 시간을 가장 잘 통과하는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 시간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지는 것이다. 사실 십자가를 피해 다니는 게 더 힘든 삶이다. 내가 기꺼이 십자가를 감당할 때 그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그렇게 감당해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작정하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꿈의 대가는 크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고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한다면, 그 꿈은 나의 인생을 세우는 비전이 되는 것이다. 욕망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나를 이끄는 삶이 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내 삶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욕망을 이루는 삶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비전 안에서 하나님과 묶여져 있다면, 결국 그 비전이 나를 이끌 것이다. 그 비전이 내게 권위를 주고, 그 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꿈이 십자가의 시간을 통과하여 우리 삶의 현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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