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2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2 정금 신앙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는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더라” (출 37:24)
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살펴봤다. 그들은 그들을 이끌어온 모세가 나타나지않자 극도의 불안에 빠졌고,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 우상을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망상이었고, 자신들을 위해 만든 우상은 오히려 그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상의 역설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우상 숭배의 죄로 무너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그 과정이 나온다.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히브리어로 이 말씀은 ‘봐야크헬(ויקהל)’이란 단어로 시작한다. ‘봐’는 접속사 ‘and’이고, ‘야크헬’은 ‘불러 모으다’란 뜻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카할(קהל)’이란 동사다. 이 ‘카할’에서 ‘케힐라(קהלה)’란 단어가 나왔다. ‘케힐라’는 ‘부름 받아 모인 공동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교회가 바로 ‘케힐라’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그들을 부름 받아 모인 공동체, 즉 ‘케힐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모세가 그들을 모은 이유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 패닉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부름 받은 그들이 우상을 예배하다가 부패해버렸기 때문이다. 모세는 불안과 혼돈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세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두 가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첫번째 명령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명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왜 이 두 가지 명령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성막을 세우는 것이 이스라엘을 신앙공동체로 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시 안식일을 지키며 누가 그들을 지으신 주인인지를 명심해야 했다. 그들은 또한 성막을 함께 지으면서 신앙 공동체로 세워져 가야 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을 세우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그들의 소명과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성막의 구성 요소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막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성막 사방은 세마포 울타리로 둘러쳐졌고, 동쪽으로 난 하나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바깥뜰에 들어서게 된다. 그 뜰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번제단이다. 이 번제단에서는 매일 일년된 어린 양 두 마리가 아침과 저녁에 번제로 드려졌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עולה)’다. ‘올라간다’는 뜻이다. 제물을 태울 때 연기가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가는 제물’이란 뜻이다. 또한 이 번제단에서는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속죄를 위해 가져오는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동물이 피 흘려 죽음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속죄의 길을 여셨다. 이 번제단은 피 흘림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물두멍이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든 큰 대야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 제사장들이 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손과 발을 씻는 곳이었다. 신약학자인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번제단’에서 일어난 일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홍해를 건너면서 온 백성이 물 세례를 받은 것은 바로 ‘물두멍’에서 일어난 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바깥뜰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던 세상에서의 죄를 씻고 정결케 하는 일들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용서받고, 세례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 된 것은 바로 성소의 바깥뜰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성소로 들어가면 그 안에 등잔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다. 등잔대는 성소 안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다. 등잔대는 우리의 삶을 비춰주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등잔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샤케드’다. 이는 ‘샤카드’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샤카드’는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하다, 지켜보다’란 뜻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물으셨다. 그 때 예레미야는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이에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 말을 지켜’가 ‘쇼케드’인데, 이 역시 ‘샤카드’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등잔대가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등잔대의 불을 밝히는 감람유는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떡상은 진설병을 놓는 곳이다. 진설병은 히브리어로 ‘레헴 파님’인데, 직역하면 ’얼굴빵’이다. 하나님의 면전 앞에 두는 빵인 것이다. 이 상 위에 열 두 덩이의 빵이 항상 올려져야 함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열두 지파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은 빵을 진설하면서 일용할 양식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한편으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바라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분향단은 지성소 바로 앞 휘장 밖에 위치해 있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등불을 손질 할 때 향을 살랐고, 저녁 때도 등불을 켤 때 향을 피웠다. 누가복음을 보면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눅 1:9-10)”라는 기록이 있다. 아침 저녁 분향하는 시간에 온 백성이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분향하는 시간에 향이 하늘로 올라가듯 백성들의 기도 역시 하늘로 올려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소의 휘장을 지나면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 안에는 증거궤가 있었고 그 위에 속죄소, 즉 은혜의 보좌(mercy seat)가 있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지성소는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계시가 임하는 곳이었다.
성소와 지성소 내부를 이루는 장식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 벽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가 다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성막 건축에 사용된 금만 29달란트 730 세겔이 들었는데, 이는 1톤에 가까운 분량이다. 광야의 성막이 밖에서 볼 때는 별 볼일 없는데,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 화려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소 안의 순금과 같이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들로 빚어지길 원하셨을 것이다. 욥은 이런 고백을 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이 겪는 모든 고난이 자신을 순금처럼 빚으시는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여겼다. 욥은 자신이 고난 받는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빚으시는 성소임을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더욱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따라서 성소의 내부를 구성하는 등잔대와 진설병을 놓는 떡상은 ‘세상의 빛’이 되시고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몰라봤다.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들은 예수님을 얕잡아 봤다. 겉모습만 보고 그 분 안에 감추어진 보물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밭에 보화가 감추어진 것을 안다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살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소의 바깥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금으로 장식된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보석과 같은 가치를 발견하며 순도 높은 신앙인으로 빚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메노라의 빛 아래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불순물들이 무엇인지 비춰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며,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을 즐겼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었다. 헤롯의 누룩은 세상 권력과 권세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며 자신들이 이룬 세상적인 성공을 자랑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 누룩의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 나라보다는 육신이 원하는 성공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에 타서 없어질 공력들인 것이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세상의 누룩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소로 나아갈 때 우리 안의 누룩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소의 떡상에서 진설병을 먹었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소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고, 우리의 생각을 말씀으로 채우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지성소에서 당신의 영광과 우리를 향한 비전을 보이신다. 우리가 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사람처럼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욥처럼 고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불순물이 제거되며 더욱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금과 같은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은 바깥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성소를 지나 지성소에 이르러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한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여기서 성소는 ‘the most holy place,’ 즉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체가 찢기며 피 흘려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졌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여셨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그래서 대제사장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성막의 바깥뜰이나 성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지성소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가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지성소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성소로 나아가야 우리는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나를 위한 우상으로 만들지 않게 된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공동체인 케힐라로 모여 회복해야 했던 하나님의 비전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우리의 삶 속에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함께 성막을 세운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함께 하나님의 전인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장차 우리가 이 터 위에 어떠한 것을 쌓았는지 그 공력을 시험하실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공력을 시험하실 때 우리가 쌓은 것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전인 교회에서 우리 모두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진 자로 세워질 수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