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 To be famous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0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 To be famous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11:4-5)

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중국의 왕언장이란 장수가 한 말이다. 그는 양나라 장군이었는데, 당나라 황제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 잡히게 된다. 당 황제는 그의 용맹을 아껴 그에게 자신의 부하가 되어 달라고 한다. 그 때 왕언장은 ‘아침에는 양나라를, 저녁에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느냐’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구차하게 살아남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것이다.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일 것이다. 명예로운 삶을 사는 것과 유명해지기를 추구하는 삶은 다른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을 짓기 시작한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다. 오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돌아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세기 11장 1절에서 바벨탑이 세워지게 된 배경이 나온다. 창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바벨탑을 건설하자는 시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이 누굴까? 성경에는 니므롯이란 사람이 나온다. 창 10:8-9,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창 10: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세기는 시날 땅의 바벨에서 그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니므롯은 ‘노아–함–구스-니므롯’으로 이어지는 노아의 증손자이다. 그런데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라는 별칭이 있다. 용사는 히브리어로 ‘기보르(גבר)’인데, 이는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표현되는데, 칼빈은 ‘여호와 앞에서 (לפני יהוה)’가 ‘before God’이 아니라 ‘against God’이라고 주석했다. 즉 니므롯은 하나님과 대항하여 맞섰던 폭군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대항한 가장 극명한 사건은 바로 바벨탑 건설이다. 11:2-4,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말하되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시날 평지는 니므롯이 건설하기 시작한 도시들이 있었던 곳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로 뭉쳐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힘의 규합’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의 중심에 니므롯이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니므롯은] 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에 잠기게 하려 하실 경우 복수를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는 물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탑을 쌓아서 조상들의 멸망에 대해 복수하려 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노예살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니므롯]의 이 충고에 열심히 따랐으며, 그래서 그들은 탑 건축에 착수했고 ··· 그 탑은 그 누구의 예상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건축되어 올라갔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I, 114, 115 (iv, 2, 3).

유대 경전 미드라쉬(Genesis Rabba)에도 바벨탑을 건축한 사람이 니므롯이라고 나온다. 그는 바벨탑을 건축하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구분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하늘로 가자”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그들은 ‘거기(샴, שם)’ 거류하며 그들의 ‘이름(셈, שם)’을 내기 위해 탑을 ‘하늘(샤마임, שמים)’에 닿게 하려했다. 그들은  하늘에 도달하려고 시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거나 그분이 정하신 경계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의 환경을 만들고자 시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가장 핵심단어는 ‘나누다(바달, בדל)’이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하늘과 땅을 나누셨다. 사람을 여자와 남자로 나누셨다. 하나님은 그러한 구별을 통해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땅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벨에서 그 경계를 허무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반역이었다.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했지만, 인간은 혼돈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크고 높은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한다. 바벨의 건축자들이 이름을 내고자 했던 것이 죄가 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이 죄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들이 그 이름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어한다.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어 낸 것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 목표를 추구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가치 있는 목적을 추구하다가 명성이 따라올 수 있다. 그러한 명성은 그 사람의 가치나 정서적 안정을 왜곡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차적인 목적이 유명해지는 것이라면 그 명성은 거짓 신이 된다. 그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높이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명성을 얻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성은 일시적인 것이다. 젊어서 유명해진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명성을 유지하는 건 힘들다.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명성을 잃으면 심리적으로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 명성을 소중히 여길수록 그 명성을 잃으면 삶의 목적도 잃게 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명해질 수 있을까? 우리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좋겠지만, 극히 작은 수일 것이다. 명성을 얻을수록 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커진다. 하루 아침에 유명해져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만큼 덧없고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독제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요할수록 내가 유명해지는 것은 덜 중요해진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단지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데니스 프레이저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We all need to remember this rule of life: The famous are rarely significant, and the significant are rarely famous.” “우리 모두는 이 삶의 법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사람은 거의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사람은 거의 유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그 환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없을 진 모르지만, 어느 누구에겐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이유는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망 그 이면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 한다. 그래서 계속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홍수가 나도 안전한 성을 쌓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도 안전한 자신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 명예, 돈을 계속 쌓아 대는 것이다. 꼭대기 올라가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무지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안전하게 해줄 것 같은 다른 우상들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대적하여 벌어지는 인류의 반역에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셨다. 11: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무리가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후로는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인간은 벽돌을 쌓으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의 시도를 꺽으셨다. ‘벽돌을 만들자’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베나(לבנה)’이다. ‘라반(לבן)’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혼잡하게 하자’는 히브리어로 ‘나발(נבל)’이다. 이것은 ‘라반(לבן)’이란 단어를 거꾸로 뒤집은 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시도는 이처럼 하나님이 단어 하나만 바꿔 놔도 허물어지는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내고자’ 원했던 그들의 바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만든 이름인 바벨은 ‘혼란’의 영원한 상징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 이후 새로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셔야 했다. 그래서 주목하신 것이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 이후 셈의 계보를 소개한다. 그리고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그가 태어난 지역은 니므롯이 정복했던 땅 갈대아 우르 지역이다. 15:7, “나는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여호와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있었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도시, 바벨론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도시를 건설하고 거기에 남아 사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하고, 안 가본 길을 택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가장 위험한 일을 선택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런 말을 했다. Faith is not certainty but the courage to live with uncertainty.”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는 용기.” 아브라함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시겠다 (창 12:2)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그저 믿음으로 순종하다가 그 믿음에 걸 맡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으로 순종한 한 사람을 통해 바벨의 혼돈을 끝내시고,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인간은 오늘날도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 없이도 돌아갈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공공기관과 학교에서도 하나님의 이름과 성경의 가치가 삭제되고 있다. 바벨의 징후가 세상에 점점 가득해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여러분이 신앙을 고백할 때 여러분은 비난과 경멸과 무시당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 23:4)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가는 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음의 길을 떠날 때, 주님은 광야에서도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바라기는 이 땅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워나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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