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부족한 것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2월 4일 설교 문정배 목사 (조지아 트빌리시 한인교회 담임)

샤밧 설교: 한가지 부족한 것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17-22)

샬롬! 반갑습니다. 저희는 조지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익환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성지학교에 참여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땅이 바로 여기지요. 그리고 2000년전 우리 예수님이 직접 걸어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복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드러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땅이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우리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특별히 저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방문한 세겜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지요.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지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이 야곱의 우물에서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시간에 홀로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이 있었지요. 이 여인의 목마름은 단지 육체적인 갈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진정한 갈증은, 그 마음 깊이있는 영혼의 갈증이었습니다. 그 영혼의 목마름을 우리 예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바로 그 장소에서…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이 여인처럼 영혼의 목마름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또다른 사람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셨지만, 오늘 본문의 청년은스스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목마름이 뭔지 잘 몰랐지만, 이 청년은 자기의 목마름이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부자’이자 ‘관원’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임을밝히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사람은 ‘부자 청년 관원’입니다. 누가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똑똑하고, 유능하고 재물도 많은 잘나가는 엘리트입니다. 행실도 착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대로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이지요.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유대인 청년입니다.

이 청년이 영혼의 목마름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나름대로 계명을 잘 지키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무엇인가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지요. 그렇게 해서는 영생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 겁니다.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갈증으로, 바로 영혼의 목마름으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은 무엇이지요? 계명대로 지켜랴~~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대답하죠.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죠. 우리 막10장 21절을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나를 따르라 하시니”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게 뭐랍니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청년의 질문이 뭐였지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냐’는 거였지요. 지금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아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요구대로 재물을 다 팔아서 나누어 주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도 그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자기의 재산을 다 헌금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 주고, 수도사들처럼 살아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이게 아니잖아요?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 부자 청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을 하셔서 돌려 보낸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그 명령은 영생을 얻는 참된 길이 아니라 그 청년의 의지를 포기시키려는 일종의 협박이었단 말인가요? 그럼 예수님이 거짓말 하신 거네요.

사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영생의 길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예수님의 말씀은단지 재물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맞습니다. 핵심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정확히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예수님을 좇고 따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에는 걸림돌이 되는, 진짜그의 삶의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것 바로 그의 재산, 소유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의 ‘한가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무엇 때문의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까? 여기에 계신 대다수의 분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도 참석하고, 또 봉사하며, 성경을 묵상하며,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곤 합니다.주님이 주시는 평안 보다는 많은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누르기도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다는 뭔가 해소되지 않은 영적인 목마름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 묻게 되지요. 이 부자청년처럼 말이죠.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을 누릴 수있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마도 동일하게 “너에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말씀하실 겁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려 놓아야 할 것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내려놓지 못하고 붙잡고있는, 진짜 내 삶의 주인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무나 가치 있고 소중한 바로 그것!그래서 내 삶의 기쁨을 좌우하고, 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내 맘의 평강을 좌지우지하는 바로 그것!나도 모르게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린 바로 그것! 그것을 주님은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겁니다.

여러분!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아십니까? 팀 켈러 목사님이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에서 이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슬픔과 절망! 둘 다 무엇인가를 상실했을 때 생기는 고통이랍니다. 슬픔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생기는 고통이랍니다. 이건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랍니다. 그러나 절망은 가장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생기는 거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가장 궁극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두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절망은 내 마음의 우상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그것이 사랑 때문이든, 사람 때문이든,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성공이나 성취 때문이든,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 때문이든, 관계 때문이든,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 바로 나의 우상이라는 말입니다.부차 정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에게 부족한 바로 그 한 가지’,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소중한 그것’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재물이 그의 우상, 그의 신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의 특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사건이 나오지요. 기억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면서 이집트를 빠져 나왔지요. 홍해도 건너고 드디어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일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고,백성들은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40일이 가깝도록 모세는 내려오지 않고, 살았는지죽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아론에게 요청하지요. 출애굽기 32장 1절,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의 말을 주목해 보세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뭐라고요? 우리를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 이게 우상의 핵심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만든 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내가 만든 신!!!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가져오라고 하지요. 그것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애굽에서늘 보던 바로 그 모양대로, 척척 알아서 만듭니다. 그리고 아론이 말하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나중에 모세가 와서 진노합니다. 그리고 아론을 책망하니까, 아론의 대답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출애굽기 32장 24절, “내가 그들에게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요. 금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대요. 저절로 송아지가 만들어져서 나왔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거짓말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이거 정말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은 이렇게 던지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가장 익숙한 모습으로, 가장 바라던 모습으로,그렇게 튀어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던지면 나오는 겁니다. 자기의 욕망으로 던지면 툭 튀어나오는 신..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신… 나의 필요를 채워줄 나를 위한 신, 던지면 쉽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욕망의 힘이예요. 뭐든지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의 욕망, 자기 추구를 한마디로 탐심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 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제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종종하신 말씀이 ‘내 남편이 내 십자가다’ 어떤 분들은 ‘내 자식이 내 십자가다’ 얘기를 하구요, ‘연약한 육체가 십자가다’라는 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렵고, 힘들고, 곤란하고, 비참하고, 버리고 싶은데 버리지 못해서 억지로 짊어져야 하는 것을 두고 ‘내 십자가다’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져야하는 십자가는 달라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정확히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를 부인해야’ 질 수 있는 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려면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진짜 십자가가 아니지요. ‘자기 부인’이 곧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한다는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짓밟혀도 좋습니다. 나는 망가져도 좋습니다. 나는 망해도 좋습니다. 내가 체면 깎여도 내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져도 좋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내가 손해 봐도 괜찮습니다. 내가 부끄러움 당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억울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게 자기를 부인 아닌가요? ‘어휴~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목사님’ 그렇게 물어보겠죠. 맞아요. 그런 걸 어떻게 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예수님이 하셨어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지요. 하나님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그정도 수준을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이예요.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따를 것인지? 자기의 욕망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것인지…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우리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 곧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부자 청년처럼 그 소중한 것 절대 포기할 수 없어서 근심하며 돌아가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주님을 따라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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