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 환대

이번 주 토라포션: 창18:1-22:24 /왕하 4:1-37 /눅 2:1-38

토라포션 3 환대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말대로 그리하라” ( 18:1-5)

 

정현종의 ‘섬’이란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끝이다. 여기서 섬이 상징하게 뭘까? 보통 섬하면 ‘외롭다, 고독하다, 홀로 떨어져 있다’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외로운 현대인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현종 시인은 인간 소외 현상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 섬에 가고 싶지만 실제로 그 섬에 가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점점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 섬에 갔다가 별로 환영받지 못할까 두려워 한다. 가진 게 없는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환대 대신 냉대를 당할까봐 감히 그 섬에 가지 못한다. 그렇게 북적이던 예루살렘 거리도 텅텅 비어 있다는 소식이다. 따뜻한 미소 대신 사람들이 언제 칼을 들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은 이제 건드리지 않고 피해야 내가 안전한 세상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나눌 토라포션에는 “바예라(וירא)”, “그리고 그가 나타나셨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두 천사와 함께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이 나그네들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살펴보고자 한다.

1-2,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임을 첫눈에 알아보았기에 그들을 영접한 것이 아니다. 그가 나그네를 환대한 것은 그 역시 나그네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남쪽 헤브론의 뜨거운 여름날, 낯선 세 사람을 보게 되자 아브라함은 달려가서 그들을 영접한다.

3-5절,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여기서 ‘주’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지칭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상대방을 ‘주’라고 하고,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면서 겸손히 상대방을 존귀한 자로 대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창 18:6-7,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그는 나그네 대접에 아내와 하인을 동원한다. 맛있는 빵에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까지 잡아 그들을 대접한다. 지나칠 정도로 극진한 대접이다.

이 아브라함의 환대는 그의 삶이 새로운 시작으로 가는 출발이 된다. 환대를 받은 천사가 말했다. 10절,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환대를 베푼 아브라함에게 이 낯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나누어 준 것이다.

히브리서 13:1-2절은 말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다. 손님 대접을 잘해서 부지중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접한 사람들이 또 있다.

사르밧 과부의 경우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아들과 함께 음식을 해먹고 그 후에 죽으려 했던 상황이었다. 그 때 엘리야가 나타난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한다. 엘리야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낸다.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병세가 위중하여 숨진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다. 이 과부의 작은 환대를 통해 결국 하나님이 그녀의 삶에 새로운 시작을 하신 것이다.

수넴 여인의 경우 그녀는 엘리사가 수넴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로 그 여인의 집에 간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작은 방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한다. 세심한 배려를 받은 엘리사는 자신의 사환 게하시에게 여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 오게 한다. 게하시는 이 여인이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다고 말한다.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 말한다. 왕하 4:16,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이 여인의 환대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환대의 정반대인 적대의 예도 나온다. 아브라함이 환대했던 두 천사를 소돔사람들은 적대한 것이다. 저녁 때 소돔성에 도착한 두 천사는 롯을 통해 간단한 식사와 숙박을 제공받는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몰려 온다. 나그네를 동성애의 상대로 요구할 정도로 타락한 사회였다. 롯이 손님들을 보호하고 대신 딸을 주려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밀치며 문을 부수려 했다. 천사들이 롯에게 말한다.

창 19:13, 새번역, “우리는 지금 이 곳을 멸하려고 합니다.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크나큰 울부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렀으므로, 주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결국 소돔은 멸망하고 만다. 환대가 아니라 적대로 사람들을 대했던 소돔 사람들은 종말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그들의 적대적인 삶의 패턴이 멸망이라는 엔딩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롯의 아내 역시 성이 멸망할 때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녀는 원래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돔이란 도시에 미련이 남았던 것 같다. 롯이 두 천사를 대접할 때 롯의 아내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가 환대를 베푸는 삶과 거리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허비하며 환대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은 욕망에 지배 당하지 않는다.

벧후 2:6-10,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 씨가 악역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했다. 가진 사람이 환대를 베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영화였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환대는 세상이 변했다고 거두어서는 안된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을 환영하고 따뜻하게 대접하는 것은 사회가 낯설어 질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환대의 공동체로 불렸다고 한다. 환대는 영어로 hospitality이다. 병원(hospital)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병원은 원칙적으로 환자의 신분이나 재산 상태를 보고 치료를 결정하는 곳이 아니다. 누구에게든 환대를 제공해주어야 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 환대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약 2:2-4,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욥바교회와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민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낯선 방문객들도 많다. 환대보다는 경계심을 갖기 쉽다. 괜찮은 사람들은 환영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누가 천사인지 모르는 일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환대는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환대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통해 환대의 태도가 형성된다. 여러분의 삶에 환대의 태도가 형성된다면 사람들은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서 따뜻한 사랑을 받게 된다. 결국 환대를 통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점점 각박해지고 더욱 경쟁적인 되어가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환대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환대를 베푸는 여러분이 허비되고, 손해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아낌없는 헌신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일하신다. 여러분의 환대를 통해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새로운 일이 여러분의 삶에 펼쳐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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