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5 구원의 완성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9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5 구원의 완성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 32:1-2)

오늘부터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다.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는 ‘한 해의 머리’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이 날 끝났다고 믿는다. 이 날 사람이 창조되었고, 아담에게는 인생의 첫 날이 시작된 날이다. 새해에 유대인들이 주고받는 인사가 있다. “레샤나토바 티카테부 베테하테무(לשנה טובה תכתבו ותחתמו)” “복된 새해를 위하여,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히고 서명되기를 바랍니다!”란 뜻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신년부터 대속죄일까지 열흘 동안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이 열흘 간의 기간을 야밈 노라임, ‘경외의 날들’이라고 부른다. 또는 여메이 테슈바, ‘회개하는 열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의 시작을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다. 구원은 완료가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처음 사랑이 식어진 에베소 교회에게 이런 경고의 말을 했다. 2:4-5,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구원의 촛대가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시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로 나아가는 신년이 되길 바란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모세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사명을 맡기셨다. 그것은 토라의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모세는 출애굽을 통해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온전히 완성되길 바랬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셨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모세는 자신이 죽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이 부른 노래를 기억하며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모세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모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모세는 하늘과 땅을 향하여 노래를 시작한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아지누 하샤마임(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는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잔(אזן)’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어로 귀가 오젠(אזן)인데, 아잔은 ‘손으로 귀를 펴다’라는 말이다. 즉 ‘귀를 기울여 듣다’라는 뜻이다. 모세는 왜 하늘과 땅을 향해 그의 노래를 들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사람은 죽어도 하늘과 땅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사랑을 쏟으셨는지 말한다.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모세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우셨고, 그 언약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백성으로 강하게 훈련시키셨다. 물론 그 광야의 훈련은 쉽지 않았다. 아직 날 수 없는데 둥지에서 떨어지는 것은 새끼 독수리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찔하고 감당이 안 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끼 독수리는 추락할 때 비로소 날개짓을 한다. 날개짓을 하다가 힘을 얻어 날아 오르게 되는 것이다. 어미 독수리에겐 새끼를 떨어뜨려도 된다는 믿음이 있다. 힘 없이 떨어지는 자기 새끼를 자신의 날개로 다시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를 광야로 보낼 때는 다 그런 믿음이 있으신 것이다. 혹독한 광야를 허락하시지만, 결국은 그곳에서도 자기의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광야가 펼쳐질 때가 있다. 내 삶이 추락하는데 그것을 막을 힘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그것이 나를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광야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서 나를 떨어뜨린 하나님도 탓하지 말아야 한다. 떨어져 봐야 비로소 창공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공을 선물로 주시려고 우리를 떨어뜨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가 연약한 나를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어내는 공간과 시간임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는 희망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쉽게 광야의 하나님을 잊었다. 모세는 그러한 미래를 예견하듯 이렇게 노래한다. 32:15,18,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된 풍요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래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수룬(ישרון)’은 이스라엘 백성의 별칭이다. ‘야살(ישר)’에서 나온 말이다. ‘야살’은 ‘곧다, 옳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다’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한 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배가 부르자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발로 차버리고 혼자 걷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제대로 걸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좌로, 우로 치우치며 삐뚤어진 세대가 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인생은 구부러진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는 재앙과 포로됨이었다. 모세는 그들의 미래를 이렇게 예견한다.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은 역사상 강한 제국을 일으켜 살찐 여수룬을 심판하셨다. 앗수르, 바벨론, 로마 제국이 강해서 그들을 침공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의 사명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을 통해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번영을 따라가다가 물질주의와 우상숭배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하셨다.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모세는 이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절대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했다. 모세가 선포했듯,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모세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될 때, 그 때 삐뚤어진 길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끝난다.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시는 것이란 사실이다.  ‘키페르 아드마토 암모(כפר אדמתו עמו)’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여기서 속죄한다는 말 ‘키페르’는 ‘카파르(כפר)’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덮다’라는 뜻이다. 오늘부터 열흘 후가 욤 키푸르인데, 대속죄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셔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 인류의 역사를 세 단어로 표현하면 ‘창조, 타락, 구속’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세의 노래에는 이 세 가지 주제가 다 담겨져 있다. 6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32:6,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신 그들의 아버지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만드시고 이 땅에 세우신 분이셨다. 신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하나님은 많은 열방 중에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다. 그리고 이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이어지게 하셨다. 여기서 분깃이라는 말은 언약 백성이 받게 되는 몫을 말한다. 그런데 그 몫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 몫에 해당하는 책임이 따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복을 받자 타락하고 만다. 번영에 취해 자기를 지으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은 언약에 따른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 중에서 다시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자, 모세는 자신이 부르는 이 노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 31: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모세가 부른 이 노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는 예언이 되었고,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었다. 실제로 이 노래의 예견들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 노래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뭘까? 그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구원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경에 나오는 인류의 이야기는 대부분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자 하와를 탓했다. 우리도 책임을 지기 보다는 남의 탓하는 본성이 있다.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긴 것은 출신 탓이고, 부모 탓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며 운명을 탓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믿었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봉인된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운명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그의 책임을 회피했을 때, 그는 낙원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책임을 회피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약 성도들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나의 행복과 번영만을 위해 열심히 살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새 언약 백성으로 ‘창조’하셨다. 언약 백성에게는 특권 만이 아니라 그 언약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이웃과 열방에 책임을 다하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을 놓치는 것이 언약 백성의 ‘타락’이다. 구원의 완성은 단순히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언약 백성의 책임을 다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을 위한 책임에는 손해가 따를 수 있다. 열방을 위한 책임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손해와 위험보다 더 높은 부르심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방을 축복할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독수리처럼 강하게 우리를 연단하셨다. 모세가 노래한 하나님을 우리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광야 한 복판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결국 풍요롭고 안정된 삶, 그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정작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놓치고, 다른 것에서 삶의 기초를 놓는다면, 우리는 곧 허물어지고 마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모세의 노래가 우리의 귀에 새롭게 들려지길 바란다.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길 바란다. 바라기는 언약 백성의 책임을 믿음으로 감당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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