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 강해 8 엘라골짜기: 다윗의 분노

2023년 12월 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8 다윗의 분노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유명하다. 그만큼 사람들은 약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것을 보며 크게 환호한다. 살면서 우리는 골리앗과 같은 강자를 대면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해결하기에 버거운 커다란 문제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다윗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며 그 비결을 찾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

사무엘상 17:1-3,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는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을 친다. 이스라엘 군대는 그 맞은편 엘라골짜기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골리앗은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로 소개된다. 성경은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기록한다.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 끝까지의 길이로 약 45cm 정도 된다. 한 뼘은 약 20cm 정도 된다. 계산하면 골리앗의 키는 약 2미터 90이었다. 이 거인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삼상 17:8-9,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골리앗은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외치며 이스라엘 군사들의 기를 죽였다.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탈영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왜 그토록 골리앗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큰 키, 육중한 갑옷, 거대한 창자루… 이와 같은 보이는 현상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위축되어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압도당했던 것이다.

이 때 다윗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파악하고 먹을 것을 전해주러 온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삼상17:26,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다윗은 골리앗의 크기와 힘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다윗의 마음 안에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한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할례 받은 자’라는 정체성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시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자였다. 물론 다른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도 할례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왜 떨었을까? 간단하다.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새로운 변수를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인해 마치 하나님이 그 전투에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기술, 그의 강점 때문에 그는 골리앗을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니었다. 골리앗은 여전히 두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었다. 다윗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진영의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을 뛰어 넘어 믿음을 발휘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오는 반응이 있다. 그것은 ‘무모하다’는 것이다. 큰 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낸다. 삼상 17:28,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 내부의 적이 등장한다. 그러나 다윗은 형과 싸우는데 감정과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분노에는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분노에는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켜내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안에 일어난 분노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나 내부의 방해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과의 일대일 대결에 나서기로 자원한 것이다.

자원하여 나선 다윗을 이번엔 사울왕이 말린다. 삼상 17:33,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이 말에 다윗이 응답한다. 삼상 17:37,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에게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늘 그를 그 위험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골리앗의 크기 역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일상에서의 믿음이 그가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가 일상에서 어떠한 믿음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시편이 있다.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만이 아니라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한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푸른 초장에서 만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고 주님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푸른 초장만 경험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골리앗에 맞설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엘라 시내

사울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다윗을 전장에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보내길 원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기에 걸맞도록 무장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삼상 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칼과 창으로 무장하는 것은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사울이 입혀주는 군복과 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자신의 일상에서 익숙한 도구들을 무기로 준비한다. 삼상 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엘라골짜기에 가면 거기에 작은 시내가 있다.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보통은 말라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매끄러운 돌들이 남아 있다. 다윗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싸움 도구인 물맷돌을 고른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자신만의 패러다임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다.

그는 골리앗에게 선포한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골리앗 앞에 선 작은 다윗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해 하셨을까? 다윗에게 하나님의 명예는 곧 자신의 명예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늘 해왔던 방식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다. 돌은 날아 갔고, 그것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히 박힌다. 골리앗은 쓰러지고 다윗은 승리를 거둔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용감히 나선 다윗을 후에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맡기신다.

믿음은 나는 손 놓고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평상시 목동으로 양을 지키는 자신의 임무에 성실했다. 그는 물맷돌로 짐승의 공격을 제압하는데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 실력이 있었기에 그는 같은 방식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나만의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내가 맡은 분야에서 능숙한 전문가가 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골리앗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두려움의 실체가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이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건강의 문제일 수 있다. 골리앗을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죽고,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겁에 질려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더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골리앗처럼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쓴다. 골리앗이 승리하는 세상에서 교회 역시 칼과 창으로 무장하려 했다. 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패러다임에 마음을 빼앗겨 힘을 추구하면서 외형은 화려해졌을 수 있지만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세상은 지금 골리앗처럼, 믿는 자들을 향해 조롱하고 호통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추락한 명예 때문에 분노할 수 있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작은 승리들을 경험해야 한다. 더 크고 튼튼한 갑옷을 축복으로 알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익숙한 물맷돌을 찾아 손에 쥐어야 한다. 내게 익숙한 패러다임으로 승부해야 한다. 내가 세상적으로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는 싸움은 이미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는 싸움이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사탄은 지금도 골리앗과 같이 커다란 문제들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를 조롱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그런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나에게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지금 나는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골리앗인가? 하나님인가?’ 바라기는 살아 계신 하나님 때문에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그 힘에 굴복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세상은 여전히 골리앗과 같은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에 용감히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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