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9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3 믿음을 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던 것이 내 눈 앞에 실상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복은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먼저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되길 바라셨다. 아브라함의 복이 뭘까?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같이 누리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다.
역사적으로 이 아브라함의 복은 그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밝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갈 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갈대아 우르,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칭함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것은 무할례시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의 상속은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의 인도를 받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갈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역할을 했던 율법 아래 더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할례를 행하고, 음식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다만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스토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이 우리에게 상처주고 괴롭혀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상처를 싸맬 필요가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잡아서 가두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를 갈망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여야 비로소 우리는 칭의와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를 부를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스스로에 대해 절망해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지옥에 이르기까지 낮춰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우리를 하늘로 올려 줄 것을 의지할 것이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상을 고발한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정죄 받는다. 즉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갈 3:10-1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따라서 우리가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은혜를 누리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율법을 지키며 착하게 살아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받으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저주 받으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임할 저주를 제거해 주셨다. 예수님은 결국 모든 인류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갈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여기서 ‘옷을 입는다’는 헬라어로 ‘에네뒤사스데(ενεδυσασθε)’이다. 이는 ‘옷 속에 스며들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존귀와 권위 안으로 우리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음의 결과를 이렇게 선포한다. 갈 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세상은 무수한 차별을 만들어낸다. 세상은 가진 자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세상은 성공의 정도에 따라 그 서열을 매긴다. 세상이 만든 차별과 특권과 서열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 내가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가지 않는 한 우리는 존귀하다는 느낌을 좀처럼 갖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복음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모두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존귀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세상이 숭배하는 명예와 부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차별과 평가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얻겠다는 시도를 그만 두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훼손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속삭인다. 율법을 지켜 의로워져야 남다른 존재가 되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유대주의자들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 외에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예수 믿는 믿음 뿐만이 아니라 할례를 행하고 음식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선행을 추가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주의자의 말에 흔들렸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이방인들은 더이상 유대인처럼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모든 저주는 이미 끊어졌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저주 대신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 시대가 주는 어려움 때문에 내가 복이라는 존재감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임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이 되라고 명하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다. 예수님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복인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 안에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별은 더이상 없다. 가진 자냐 못 가진 자냐 하는 차별은 더이상 없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의 존재를 더이상 흔들 수 없다. 이 믿음을 구하고, 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이 믿음을 가진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나의 존재가 복이 되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