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9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4 유업을 구하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4:7)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이런 말을 남겼다. “The greatest legacy one can pass on to one’s children and grandchildren is not money or other material things accumulated in one’s life, but rather a legacy of character and faith.”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은 평생 모은 돈이나 다른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인성과 믿음이다.” 여러분이 아들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유업으로 받기 원하는가?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4: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전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시대 때는 주인의 아들이라 해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가정교사의 지도 아래 있어야 했다. 주인의 아들은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유업을 상속받을 수 없었고, 또한 매도 맞아가면서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아야 했기에 종과 다름이 없었다. 바울은 우리도 이전에는 ‘이 주인의 아들과 같았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했고, 이방인들은 세상의 초보 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하며 살았었던 것이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의 시대를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율법과 세상의 가치에 종 노릇 하며 사는 삶을 끝내기 원하셨다. 여기서 ‘속량’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엑사고라조 (ἐξαγοράζω)’다. 이는 ‘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종으로 팔려 종 노릇 하고 있는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종을 사는 사람이 그 종의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것은 죄에 종살이 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주기 위해서이다. ‘자녀’의 명분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이다. 그것은 고대사회에서 아들만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의 명분’은 헬라어로 ‘휘오데시아 (υἱοθεσία)’다. 이는 ‘아들로 받아들이다, 양자 삼다’라는 뜻이다. 로마시대 때는 전쟁이 많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귀족들은 아들을 많이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유산을 상속할 아들이 필요했기에 노예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골라 양자로 삼았다. 양자가 된 노예는 입양이 되면서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 받는 자가 된다. 이제 그는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 ‘다 이루었다’라는 헬라어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는 ‘다 지불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죄에 종 노릇 하던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 받는 자가 된 것이다.
자 그런데 아들의 명분에는 하나의 개념이 더 필요하다. 바로 ‘성장’이다.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더이상 종 노릇 하던 삶을 벗어나 아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종 노릇 하지 않고 아들처럼 살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또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갈 4: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다. 이 영의 인도를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그분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업은 헬라어로 ‘클레로노미아스 (κληρονομίας)’다. ‘클레로’는 ‘제비를 뽑아서 얻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분배에 의해 얻게 되는 세습 재산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기서도 ‘유업’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 역시 ‘클레로노미아스’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것이 그분의 유업이다. 이 유업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과 죄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땅의 유산을 물려받으며 땅의 영광을 누리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유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그 유업의 영광은 이 땅의 유업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유업을 얻기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우리는 우리의 이전 삶이나 세상에 종 노릇하지 않게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단순히 죄에서 구원받은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그분의 유업을 상속하는 아들이 되는데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영광 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 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 받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는 상속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전에 그들이 종 노릇 했던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고, 음식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이렇게 꾸짖는다. 갈 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성령을 따르지 않을 때 너무도 쉽게 이전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율법의 노예가 되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성령님의 인도가 필요할까?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율법의 종 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에게 허락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명분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이러한 자유로 이끌기 원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가지 목표를 제시한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안에 이루어지는 목표를 세운다. 베드로 역시 성도들의 부르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역시 성도들의 목표가 신성한 상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단지 죄에서 속량 받는 것이 아니다. 노예에서 양아들이 되는 신분의 변화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 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까지 물려받는 상속자가 될 때 우리를 속량하여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종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들은 두려움에 기인하여 종교생활을 한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눈치를 보며 내일에 대한 염려에 매어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는다.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시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과거의 모든 죄와 잘못은 아버지가 그 값을 지불하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위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실패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환경이나 세상의 평가와 판단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누구인지 정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당신의 유업을 상속할 아들로 보신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자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라는 명분을 얻었다면, 이제 율법이나 세상에 종 노릇 하지 말고,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는 아들로 살아가길 바란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수시로 기도하셨다. 그러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아들로 사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기 위해 성령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고난까지 상속 받는 아들이 될 수 있다. 땅의 영광을 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여러분이 아들의 명분을 받았기에 이제 그분의 영광과 고난을 함께 상속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