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10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1)
신년을 맞이하며 이스라엘에 들려온 소식은 여덟 명의 군인이 전사했다는 뉴스였다. 새 해를 맞이했어도 지금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전쟁의 소식으로 인해 우울하다. 승구 친구들도 다시 이스라엘 북쪽으로 소집되어 갔다. 이들 부모들에게 아들을 떠나 보내고 맞이하는 새 해는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다. 유대 신년인 ‘로쉬 하샤나’에는 많은 별칭이 있다. 그 중 첫번째는 ‘욤 하랏 올람(יום הרת עולם)’이다. 이 말은 예레미야서에서 나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멸망에 대해 예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절망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탄식했다. 태어나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어머니가 자신을 영원히 잉태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랏 올람(הרת עולם)’이란 표현이다. ‘영원히 임신하다’란 말이다. 어느 무명의 시인은 로쉬 하샤나를 ‘욤 하랏 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세상이 잉태된 날’이란 뜻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 날 아담이 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마무리되었다. 시인은 이어서 이 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심판하시리라’고 노래한다.
이 심판과 관련하여 로쉬 하샤나의 또 다른 별칭이 있는데, 그것은 ‘욤 하딘(יום הדִין)’이다. 이는 ‘심판의 날’이란 뜻이다. 이 날 하늘의 문들이 열리고 하늘의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바로 ‘테루아’다. 그래서 로쉬 하샤나를 ‘욤 테루아(יום תרועה))’라고 한다. 욤 하딘부터 열흘간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간으로 보낸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한다. 유대인들은 신년에 ‘우네타네 토케프(ונתנה תקף)’라는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한다. 그것은 “Let us speak of the awesomeness, 경외함에 대해 이야기 하자”란 뜻이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On this day… You will remember all that was forgotten. You will open the Book of Memory… On Rosh Hashanah it will be inscribed, and on Yom Kippur it will be sealed: How many shall pass on and how many shall be born; who will live and who will die; who will die at his predestined time and who before his time; … who will enjoy tranquility and who will suffer; who will be impoverished and who will be enriched; who will be degraded and who will be exalted…” “이 날… 당신은 잊힌 모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의 책을 열 것입니다… 로쉬 하샤나에 기록될 것이고, 욤 키푸르에 봉인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날 것인가;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가; 누가 정해진 시간에 죽고 누가 그 시간 전에 죽을 것인가; … 누가 평온을 누리고 누가 고통을 받을 것인가; 누가 가난해지고 누가 부유해질 것인가; 누가 낮아지고 누가 높아질 것인가…” 이 기도문에 의하면 로쉬 하샤나에서부터 욤 키푸르까지 열흘 간의 기간 동안 모든 사람의 그 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누그러뜨리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테슈바, 테필라, 쩨다카라는 것이다. 테슈바는 회개하는 것이고, 테필라는 기도하는 것이고, 쩨다카는 구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열흘 동안 열심히 회개하고, 기도하고, 구제금을 많이 낸다. 욤 키푸르 날에는 하루 금식까지 한다. 그것은 욤 키푸르 날, 기억의 책이 봉인 되기 전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새해 인사가 “레샤나토바 테카트부”(לָשנָה טוָֹבה תָכֵתבוּ)”다. “복된 새해,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길 바란다”란 뜻이다.
로쉬 하샤나의 또 다른 별칭은 ‘욤 하지카론(יום הזכרון)’이다. ‘기억의 날’이란 뜻이다. ‘기억’은 로쉬 하샤나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래서 신년 첫 날에는 ‘기억’에 관한 토라포션을 읽는다. 먼저 창세기 21장에서 하나님이 사라를 기억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괴로웠던 사라를 돌보셨다. ‘돌보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פקד)’다. 파카드는 ‘방문하다’란 뜻이다. 또한 ‘숫자를 세어 계산하다’란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할 날짜를 셈하고 계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사라를 방문하셔서 그녀의 괴로움을 깊이 들여다 보셨다. 하나님의 보살핌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때에 잉태하게 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열방의 아비와 어미로 믿음이 자랐을 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들에겐 기다림도 그들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신년에 사라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행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삶에서 아직 응답되지 않은 오래된 약속도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을 믿으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있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을 돌보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신년 첫 날에 읽는 또 다른 성경 본문은 사무엘서 1장이다. 한나에 관한 이야기다.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은 역시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괴로웠던 한나를 기억하시고 사무엘을 잉태케 하신다. 여기서 ‘생각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자카르(זכר)’다. ‘자카르’는 ‘기억하다, 마음에 품다’란 뜻이다. ‘자카르’는 생각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행동으로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반드시 액션을 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기억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아들 사무엘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한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었다. 불임이었던 한나가 믿음으로 아들을 기다리며 기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한나에게 바랐던 목적이었다. 그 때가 찼을 때 사무엘이 태어났고, 기도의 어미 한나가 있었기에 사무엘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장면은 창세기 8장에도 나온다.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다. 노아는 약 100년 가량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방주를 지었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 대한 메세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을 조롱하던 사람들 때문에 노아는 외로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나를 잊으신 것 같을 때, 약속이 더디 이루어질 때 우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잊은 적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를 기억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허락하셨다. 주님 한 분 때문에 살아가는 여러분을 세상은 오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힘든 세상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시고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을 때 그들을 기억하시고 액션을 취하셨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은 구원하신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악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씨름과 여러분이 힘들어 하는 문제를 기억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위해 방문하시는 분이다. 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새 해가 되길 바란다.
유대인들이 신년 둘째 날에 읽는 성경 본문은 예레미아서 31장이다. 렘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이 ‘자카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기억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처녀 때에 갖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인애와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나누던 그 사랑을 그냥 과거의 일로 묻어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사랑이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 원한 회복은 단순히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다. 하늘 아버지의 이 애끓는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로쉬 하샤나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읽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로쉬 하샤나에 읽어야 하는 신약 성경의 본문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24장이다. 마 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서 ‘큰 나팔 소리’는 히브리어로 ‘테키야 그돌라(תקיעה גדולה)’다. 유대인들이 로쉬 하샤나 때 마지막으로 제일 길게 부는 나팔 소리가 ‘테키야 그돌라’다. 유대인들은 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주님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온 땅의 왕으로 오실 것이다. 주님은 오셔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문, 파카드인 것이다. 예수님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시는 그날은 정말 마지막 심판의 날, 욤 하딘인 것이다. 그 때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구제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얼마나 회개하고 금식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의와 공로로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믿어야 우리는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하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유대인의 가을 절기는 로쉬 하샤나, 욤 키푸르, 수콧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해 마지막 달은 엘룰월이다. 그런데 엘룰월이 시작되면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까지 40일이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테슈바’의 기간으로 지낸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기간이다. 즉 자신들을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하는 것이다. 아가서에는 유명한 신부의 고백이 나온다.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니 레도디 베도디 리(אני לדודי ודודי לי)”이다. 여기서 각 히브리 단어의 첫 자를 결합하면 엘룰(אלול)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래서 엘룰월은 자신을 정결히 하며,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신부의 고백을 회복하는 달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팔절에 모든 결혼 준비가 끝났다는 나팔 소리를 듣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면 신랑이신 주님과 거처를 같이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봄절기인 유월절, 초실절, 오순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가을 절기인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의 의미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을 절기를 주목해야 한다. 그 의미가 완성될 날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절기를 지나며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아니 레도디 베도디 리’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런 신부의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이다.
신년의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벌 주려고 기다리는 분이 아니다.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돌아오시기까지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매 해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떠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그 분의 사랑 앞에 더 담대히 나아가는 민족이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이 나팔절에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새로운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