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 소망의 닻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1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6: 소망의 닻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 6:19-20)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바다를 항해 하기 위해 사람들은 돛을 달고 닻을 만들었다. 돛은 바람의 힘을 이용해 항해하기 위한 것이다. 닻은 항구에 들어온 배를 안전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로마제국 아래 기독교 탄압이 극심했던 때 기독교인들의 심벌은 닻이었다. 로마 카타콤에는 닻이 물고기와 함께 새겨진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을 보면 닻이 물고기에 연결되어 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인데, 익투스(ΙΧΘΥΣ)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라는 문장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글자다. 익투스는 박해 받던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암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담겨져 있었다. 닻이 물고기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께 닻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 배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닻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가 가진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다고 말하며 그들을 격려한다. 불안한 상황에서 소망이 없다면 남는 것은 절망 뿐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믿는 자에게 주어진 소망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핍박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행실을 회개했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안수를 통해 직분자로 세워졌고,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이 오자 마치 닻이 없는 배처럼 흔들리며 표류하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 열거된 여섯 가지 사항은 기독교의 기초적인 진리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란 표현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버리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펜테스(αφεντες)인데, 이는 ‘떠나다(leave), 보내다(let go)’란 뜻이다.이 말은 기독교의 기초 교리에 머물지 말고 더욱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흔들린다. 그러나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길 바랬다. ‘풍성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포리아(πληροφορια)’인데, 이는 ‘철저한 확신(full conviction)’이란 뜻이다.그는 흔들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의 철저한 확신에 이르길 바랬다.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길 원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6: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그의 나이 75세 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녀를 갖게 된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00세에 이르러서 였다. 아브라함이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는데 걸린 시간은 25년이었다.

로마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해진 것은 그가 백 세에 이르러서 였다.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다. 상황을 보면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 대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진정한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믿음의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약속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절대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25년 이라는 시간 동안 아브라함을 준비시키신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은 불필요하거나 허비된 시간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기다림은 그의 믿음이 영글어 가는 시간이었다. 기다림도 그에게 필요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다윗에게도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 그에겐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동굴 속에서 지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캄캄한 동굴에 갇혀 하나님 한 분 앞에 엎드려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 받아야 했던 수업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빚어지길 원하셨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따르는 자들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미친 권위자를 그 위에 두셨다. 만약 다윗을 핍박했던 사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다윗에게 아둘람의 시간은 그가 바보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의 삶에서 원망과 분노라는 독기가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그의 시간이 멈추고 그의 자아가 죽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다윗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시간이었다. 아둘람은 허비되고 낭비되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데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인생의 시간이 멈춰진 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구하며 소망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굴 속에서 이러한 시를 남긴다. 57: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다윗이 관계속에서 고난 당한 것은 그가 왕으로 준비되는 시간이었다. 그가 사울을 통과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맡기셨다. 하나님은 다윗이 철저히 주님께 피하며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렀을 때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그의 믿음이 성숙해졌을 때 그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둘람과 같은 기다림의 시간은 분노의 칼을 가는 시간이 아니다. 용서를 연습하는 시간이다. 절망하는 시간이 아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새벽 여명의 비전을 품는 시간이다. 한숨과 의심을 뿜어 내는 시간이 아니다. 절대 소망과 절대 믿음을 벼리는 시간이다.

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것은 창세기 22장에 나온다. 22:16-17,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이 약속이 이루어졌는가? 이루어졌다. 모든 제국은 멸망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았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단지 아브라함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맹세는 그가 맹세한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후대의 믿는 자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1세기 흔들리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맹세는 여전히 그들에게도 유효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19-20,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인생은 항해와 같다. 이 인생의 항해를 위해서 우리는 소망이라는 영혼의 닻을 준비해야 한다. 비바람과 거친 파도로 인해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닻이 있는 인생은 떠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영혼의 닻과 같은 튼튼하고 견고한 소망을 가지게 될 때 휘장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한다. 휘장 안은 지성소다. 지성소가 어떤 곳인가? 속죄가 이루어진 곳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곳이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곳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그곳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앞서 가신’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드로모스(προδρομος)’인데, 이는 ‘선두주자’란 뜻이다. 예수님이 선두주자로 휘장 안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우리의 신앙이 지성소로 나아가야 세상의 풍파에도 요동하지 않게 된다. 지성소가 우리가 살 길이다. 우리의 신앙이 지성소에 닻을 내려야 우리는 비바람과 거친 파도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 때 우리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난 없는 삶은 없다. 풍랑 없는 바다는 없다. 어려움이 올 때 우리는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소망의 닻이 있는 인생은 떠내려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여러분의 인생은 이 예수님께 닻이 내려져 있는가? 혹 여러분의 신앙은 초보적인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고 있지 않는가? 여러분의 신앙이 지성소에 이르게 되기를 축원한다. 지성소에 이른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기뻐하며 그것을 이 세상 가운데로 옮기는 사람이 된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인생의 항해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믿음의 항해를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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