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 5: 아합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2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Kingship 5: 아합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왕상 21:25)

2017년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텔 아벨 베스 마아카에서 한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사진). 이것은 기원전 9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과연 이것이 누구의 조각상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아합 왕일 가능성이 크다.

살만에셀 3세 석비

아합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또 있다. 앗수르 제국 살만에셀 3세의 비석이다. 이것은 1861년 터키의 한 마을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거기엔 이런 내용이 있다. “나(살만에셀 3세)는 그 왕의 도시 카르카르를 파괴하고 황폐화시키고 불로 태웠다: 아람 왕 하닷 에셀의 병거 1,200대, 기병 1,200명, 군사 20,000명… 이스라엘 왕 아합의 병거 2,000대, 군사 10,000명…” 이 기록을 통해 아합이 실존 인물이며, 그가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 아람보다 더 많은 수의 병거를 가진 강력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아합은 기원전 873년부터 851년까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이었다. 그는 강한 군사력과 함께 경제적 번영을 이룬 탁월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렇다.왕상 16:33,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아합 왕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일까? 그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이다. 오늘 이 사건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텔 이스르엘

왕상 21: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아합은 아람과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 후 그는 당시 이스르엘에 별궁을 짓고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 아합은 별궁 근처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 잡힌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 이스르엘 평야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씨를 뿌린다”라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파종과 수확이 끊이지 않는 풍요로운 땅이다. 이곳에 텔 이스르엘이 위치해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 고고학팀은 이곳에 남아 있는 구조물들이 기원전 9세기 왕궁의 일부였던 것으로 진단했다. 아합 왕은 여름에는 산지에 있는 사마리아 궁에 살았지만 겨울에는 따뜻한 이스르엘 별궁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텔 이스르엘 근처에는 ‘엔 이스르엘’이라는 샘이 있다. 학자들은 텔 이스르엘과 이 샘 사이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012년에 하이파 대학교의 노마 프랭클린 박사의 지휘 아래 이곳에서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텔 이스르엘 기슭에서 기원전 9세기의 와인 프레스를 발견했다. 이것이 나봇이 사용했던 와인 프레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9세기 경의 와인 프레스

왕상 21: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아합의 이스르엘 궁전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동쪽으로 벳산을 거쳐 요르단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동북쪽의 다메섹으로 가거나, 북쪽의 두로와 시돈으로 갈 수 있었다. 위치도 좋고 따듯했던 이곳에서의 삶은 아합을 행복하게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합은 궁전 테라스에서 이스르엘 평야를 바라보다가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 저게 내 거면 참 좋겠는데…”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한다. 말이 제안이지 왕의 명령과도 같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봇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한다. 왕상 21:3,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여기서 ‘유산’은 히브리어로 ‘나할라(נחלה)’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의미한다. 레위기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레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나할라’는 하나님의 것이었고, 권력으로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이 ‘나할라’였기에 왕에게라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나봇의 거절에 아합은 근심하며 왕궁으로 돌아간다. 그는 왕이었지만 그도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땅에 대한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제로 팔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합은 왕궁에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참 쪼다 같은 왕이다. 이 꼴을 본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이세벨이다. 이세벨이 누구인가?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다. 엣바알은 ‘바알이 함께 한다’라는 뜻이다. 그는 왕이자 바알을 섬기는 대제사장이었다. 그의 딸 이세벨도 ‘멜카르트(Melqart)’를 섬기는 여자 제사장이었다. 멜카르트는 시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이었다. 바다와 항해를 주관하는 신이었다. 아합은 페니키아 지역의 나라들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바알을 숭배하는 이세벨과 결혼한다. 성경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바알을 섬겨 예배했다고 말한다(왕상 16:31). 열왕기상 18장 19절을 보면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 선지자가 450명이었고, 아세라 선지자는 400명이었다. 이세벨은 이처럼 바알 종교의 제사장 850명을 북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을 통해 북 이스라엘 전체에 바알 종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북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이세벨의 인장

1960년 초 한 유물 시장에서 구매된 인장이 이스라엘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이 인장에 적힌 이름이 밝혀진다. 그것은 ‘레이자벨(לאיזבל)’이었다. 히브리 문자 ‘라메드(ל)’는 ‘누구에게 속함’ 또는 ‘누구를 위한’이란 뜻이다. 결국 ‘레이자벨’은 ‘이세벨의 소유’라는 의미이다. 왕의 아내로서 자신의 소유를 인증하는 인장을 만들 정도로 이세벨은 소유욕이 강한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세벨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는 아합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상 21:7,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의 말이다. 당시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왕이 못 할 일은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자란 이세벨은 아합이 왕으로서 일개 백성의 밭 하나를 빼앗지 못하고 누워 있는 모습에 속이 터졌을 것이다.여기서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난다. 바알의 종교적 전통 아래 성장한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 같은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땅은 하나님의 것”이란 개념이 없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란 개념도 없었다. 그녀는 아합이 세상의 다른 왕들처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봇을 죽일 계략을 짠다. 나봇이 하나님의 율법 때문에 땅 팔기를 거부했으니 자신도 하나님의 율법을 역으로 이용한다. 이세벨은 나봇이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 증언을 만들어 냈고, 이를 입증할 두 명의 증인을 매수한다. 결국 나봇은 이 두 명의 거짓 증언으로 죄가 인정되어 돌에 맞아 죽고 만다. 이후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상 21:15,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이에 아합은 그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간다.

무고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기까지 아합과 이세벨은 수차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번째 계명을 어긴다.“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아홉번째 계명을 어긴다.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번째 계명을 어긴다. 이들은 장로와 귀족들을 동원해 겉으로 보기엔 합법적인 절차로 나봇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 결국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그들에게 보내 다음과 같은 심판을 선고하셨다. 왕상 21:19,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나봇 이야기는 왕이 한 백성의 포도원을 빼앗은 작은 헤프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합 자신과 그의 가문이 멸망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의 예언은 약 10년 뒤 정확히 성취된다.왕상 22:37-38, “왕이 이미 죽으매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 사건을 돌아보며 한 가지 질문이 들었다. “왜 성경의 가치와 이방 여인, 이세벨의 세계관이 충돌했을 때, 왜 아합은 그녀에게 끌려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계관의 배후에 있는 것이 ‘영’이기 때문이다. 아합은 결국 그녀의 세계관 이면에 있는 ‘이세벨의 영’에 의해 조종 당한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6:11-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아합은 결국 악한 영들과 상대했지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지 못했기 때문에 마귀의 간계에 넘어간 것이다. 사탄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악한 영의 영향 아래 있던 이세벨을 극복하지 못한 아합은 결국 다스림의 권세를 상실했다. 아합은 하나님의 법을 알고도 이방의 법에 타협했다. 아합은 돈과 섹스와 권력을 보장하는 바알을 따라가다가 하나님 신앙을 상실했다. 그는 더 많은 소유와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버렸다.

아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세벨의 영을 극복해야 다스림의 권세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며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2:20-21,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도 이세벨이 나온다. 사람들을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이세벨을 용납했던 것이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 시대, 이세벨의 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게 하는 것이 이세벨의 영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단을 허무는 것이 이세벨의 영이다. 성경의 가치를 말하는 주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이세벨의 영이다. 이 이세벨의 영을 따라 욕심을 추구하다 보면 너무도 쉽게 이웃의 소유를 탐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우습게 하게 된다. 필요하다면 살인도 쉽게 저지른다. ‘이세벨의 영’은 사람을 조종하는 영이다. 이 영에 이끌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것이 행음, 즉 영적 간음인 것이다. 바알의 현대식 이름은 ‘맘몬’이라 할 수 있다. 맘몬은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돈과 성적 쾌락과 권력을 약속한다. 바울은 물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렇게 고발한다.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또한 바울은 골로새서 교회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탐심이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탐심은 아합처럼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는 욕심이다. 아합의 시대 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 당시에도 탐심이라는 우상 숭배가 교회 안에 만연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가? 과연 나는 이세벨의 영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도 요한은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약속한다.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주님은 교회인 우리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로 초대하신다. 이세벨의 영에 굴복한 자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세벨의 영을 극복한 자가 진정한 다스림의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을 무너뜨린 게 탐심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맡겼지만 그는 탐심에 굴복하여 그 권세를 상실했다. 베드로는 경고한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이세벨의 영이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며 우리를 조종하려 할 때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것을 대적해야 한다 이세벨의 영은 오늘도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라는 세계관으로 우리를 조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이웃과 화목하게 사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조종 당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얻은 게 아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실한 자가 되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세벨의 영을 극복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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